오피니언

[기고] 오늘날의 한국 개신교회와 개혁의 과제들(I)

김승진 목사 (침례신학대학교 교회사 명예교수/ 침례교역사신학회 회장)

편집자 주] 필자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에 한국 개신교회가 겪고 있는 병리현상들을 진단하고, 건강하고 신뢰받는 한국 개신교회의 회복을 위해 나름의 처방을 제시하고 있다. 이 글은 필자가 최근 출간한 『종교개혁가들과 개혁의 현장들: 아직도 미완성인 종교개혁』(서울: 나침반출판사, 2015)에서 제9장의 내용 중 일부를 전재한 것이다. 필자의 허락을 얻어 3부로 나누어 연재한다.

1. 종교개혁 500주년과 한국교회의 위기

김승진
(Photo : ⓒ 침례교신학대학교)
▲김승진 교수 (침례신학대학교 교회사 명예교수)

요즈음 한국의 개신교회(프로테스탄트교회)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16세기 로마가톨릭교회에 "항의하면서"(protest) 종교개혁운동이 시작되었는데, 그로 말미암아 형성된 프로테스탄트교회가 오늘날 한국에서는 불신자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고" 있다.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기독교에 대해 신랄한 비판과 공격을 하는 대표적인 단체는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반기련]이다. 이 단체는 온라인자료 www.antichrist.or.kr을 통해 한국교회와 한국개신교 크리스천들의 신앙행습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최근 통계청의 종교인구조사에 의하면, 한국의 종교인구 가운데 유독 개신교 그리스도인 인구만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2005년 11월 1일 현재 한국 개신교 그리스도인 인구는 8,616,000여명으로 집계되었다. 이는 10년 전인 1995년의 8,760,000여명보다 1.6% 줄어든 숫자이다. 10년 만에 144,000여명이 감소한 것이다. 반면에 한국의 로마가톨릭교회의 교인수는 1995년도에 2,951,000여명이던 것이 2005년도에는 5,146,000여명으로 약 74.4%가 늘어났고, 불교는 같은 기간에 3.9%가 늘어나 10,726,000여명에 이르렀다("통계청 종교 인구조사에 나타난 한국교회," 온라인자료, http://blog.naver.com/d3ps/80027449775).

2013년 12월 10일-11일에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서 행한 전화면접조사 결과에 의하면, 2013년 현재 한국의 개신교회를 "신뢰한다"(매우+약간)가 19.4%, "보통이다"가 36.0%, "신뢰하지 않는다"(별로+전혀)가 44.6%로 나타났다. 6년에 걸친 4차례의 조사 결과, 한국 개신교회의 사회적 신뢰도가 17-19%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한국 개신교회의 신뢰도 하락이 특정사건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만성적인 이유 때문임을 나타낸다("2013년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결과 자료집[2014. 2. 5.],"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온라인자료, www.cemk.org). 상기 여론조사에서 "가장 신뢰하는 종교"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로마가톨릭교 29.2%, 불교 28.0%, 개신교 21.3%, 유교 2.5%, 원불교 1.3% 등으로 나타났다(Ibid.).

한국 개신교회의 영적인 침체와 숫자적인 감소 현상을 바라보며, 개신교회 내의 양식있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그리고 평신도 지도자들이 한국교회의 개혁에 대해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무척 고무적이다. 대표적인 단체로 사단법인인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있다(이 단체는 민주화에 대한 열기가 절정을 이루던 1987년 12월에 손봉호, 김인수, 이만열, 장기려, 원호택, 이장규, 강영안 등 함께 성경공부를 하던 기독교인들이 뜻을 모아 시작했다). 동 단체는 "2014년, <기윤실>은 정직한 그리스도인, 신뢰받는 교회,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위해 더욱 성실히 섬기겠습니다"라는 표어를 내걸고, 자발적 불편운동, 기윤실 포럼, 깨끗한 총회운동, 교회의 사회적 책임운동, 6.4 지방선거운동, 기윤실 청년 TNA(Talk and Action), 교회세습 반대운동/교회재정 건강성운동 등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Ibid.). 인터넷 신문을 비롯한 각종 기독교 언론매체들에서도 한국 개신교회의 정화와 개혁 그리고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자성을 촉구하는 논설들을 쏟아내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를 염려하는 평신도들과 학자들도 교회개혁을 위한 목소리를 단행본에 담아 출간하고 있다. [최근에 출간된 대표적인 책으로는 신성남, 『(꼴보수 공학박사 신 집사의) 어쩔까나 한국교회』 (서울: 아레오바고, 2014); 이주형, 『한국교회, 누구를 위한 곳인가? 교인, 교회, 교단, 모두 혁신하라』 (경기도 고양: 도서출판 상상나무, 2014), 강영안 외, 『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3), 이만재, 『교회 가기 싫은 77가지 이유』 (서울: 규장, 2000), 이학준, 『한국교회, 패러다임을 바꿔야 산다』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1), 황영철, 『다시, 겸손을 말하다』 (서울: 이레서원, 2009) 등이 있다.]

종교개혁운동 500주년을 기념하고 있는 시점에서, 필자는 한국의 개신교회가 앓고 있는 만성적인 질환이 무엇인지를 진단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도하셨던 참 교회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동시에 한국의 개신교회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그리고 더 나아가 다른 종교인들과 불신자들(전도대상자들)로부터 신뢰를 받는 종교가 되기 위해서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2. 신약성서적인 교회와 구원하는 믿음(Saving Faith)

무엇보다도 한국교회는 신약성서가 말하고 있는 교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세우고자 하셨던 교회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의 공동체(Believers' Church)이어야 한다. 성경 어디에도 교회당(Church Building)을 교회(Church)로 묘사한 적이 없다. 교회와 교회당을 분별하지 않거나 교회당을 구약의 성전이나 제단으로 여기는 것은 심각한 무지(無知)요 신학적 타락이다. 죄인이 교회당 안에 들어와 있다고 해서 자연적으로 교회가 되지 않는다. "회개하고 돌이켜서"(행 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 다른 길이 없다. 필자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받는 유일한 길(요 14:6; 행 4:12)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누구도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믿고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다른 종교인들에게도 자신들의 신앙과 신앙생활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종교인들을 내심으로는 전도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면서도, 그들의 신앙과 생활행습에 대해 비하해서는 안 되고 존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은혜와 사랑을 베푸는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런데 회개와 믿음의 주체는 인간이다. 물론 궁극적으로는(혹은 결과론적으로는) 하나님께서 회개하도록 하시고 믿도록 하시는 분이지만, "돌이키고 믿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성령님의 감동을 입어 죄인임을 깨닫고, 그래서 죄용서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마음문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요 나의 주님"(my Savior AND my Lord)으로 영접하는 것은 인간이다. 하나님이 회개하시는가? 하나님이 믿으시는가? 회개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지만 인간이 회개하는 것이고, 믿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지만 인간이 믿는 것이다. 그래서 침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라고 외쳤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감옥의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고 명령하며 약속하였다. 극단적인 칼빈주의자들(Hyper-calvinists)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total depravity of man)에게는 "믿을 능력도 없다"고 하는데, 인간이 믿을 수 있으니까 침례 요한과 사도 바울이 "믿으라"고 명령했던 것이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 앞에서 "예" 혹은 "아니오"라고 결단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능력을 침례교에서는 "종교문제에 있어서의 영혼의 유능성"(Competence of the Soul in Religion)이라고 말한다. 비록 인간이 죄로 인해 타락은 했지만, 성령의 감동하심이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 앞에서 최소한 "반응할 수 있는 능력"(ability to respond)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유의지를 인간에게 선물로 주셨는데, 비록 타락하여 스스로를 구원할 수는 없지만, 이성적 존재인 인간은 "생각할 수 있는 능력"(ability to think), "선택할 수 있는 능력(ability to select)," "결단할 수 있는 능력"(ability to decide)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 어디에도 "회개한다, 믿는다"는 말이 수동태로 사용된 적이 없다. "믿는 것"은 "믿는 것"(믿는다고 선택하는 것)이지, "믿어지는 것"이나 "믿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죄인의 마음문 밖에서 노크만 하실뿐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무뢰한이나 폭군이 아니시다. 그 분은 죄인이 마음문을 열고 자신을 초청해 모셔들이는 결단을 하기를 기다리시는 인격적인 분이시다. 죄인인 마음문을 여는 결단을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 영적인 거듭남의 체험을 하고, 뱁티즘을 통해 신앙고백을 분명하게 한 신자들이 교회가 되는 것이다. 성서적인 뱁티즘은 "내적이고 비가시적이고 영적인 체험을 외적으로 가시적으로 물리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Biblical Baptism is outer, visible, physical expression of the inner, invisible, spiritual experience). 따라서 "내적이고 비가시적이고 영적인 체험," 즉 거듭남의 체험을 한 신자들에게만 뱁티즘을 베풀어야 한다. 신자의 뱁티즘이 교회로 들어가는 관문인 것이다(행 2:41-42). 유아뱁티즘(Infant Baptism)이 하나님과의 언약이 아니라, 회심체험(conversion experience)을 한 신자가 받는 뱁티즘(신자의 뱁티즘, Believer's Baptism)이 신약성서적인 의미에서의 하나님과의 언약이다. 내적인 거듭남의 체험이 없는 갓난아기나 어린 아이나 불신자에게 뱁티즘을 베푸는 것은 의미 없는(meaningless) 일이다. 단지 머리나 몸에 물을 적실뿐인 것이다. "마른 죄인"(dry sinner)을 "젖은 죄인"(wet sinner)으로 만들뿐인 것이다.

필자는 최근에 어느 기독교신문에 게재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질문과 답변"(Q&A) 란에서 어떤 성도가 이런 질문을 하였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교회에 가는데, 교회란 무엇인가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교회의 근본적인 의미는 '창세 전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기로 작정된 모든 자들'이예요. 이것은 과거, 현재, 미래 전체를 포함하는 의미로서 선택받은 모든 자들을 가리켜요. 즉, 이미 구원받은 자들, 현재 구원받고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 앞으로 믿게 될 자들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지요....." ("한국크리스천신문," 제114호, 2015년 10월 29일)

그런데 "앞으로 믿게 될 자들"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으니 여전히 불신자들이요 죄인들이요 그래서 전도대상자들이다. 불신자들과 죄인들 그리고 전도대상자들을 포함하는 교회는 "신약성서적인 교회"(New Testament Church)라고 말할 수는 없다. 신자들(Believers)과 불신자들(Unbelievers)이 함께 공존하는 공동체는 신약성서가 말하는 "참 교회"(True Church, Rechte Kirche)가 아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날 때부터 맹인된 자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예수님이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순종하여 그의 밝은 눈으로 만물을 보게 되는 기적을 체험하였다. 일정한 시간이 흐른 후에 예수님이 그를 찾아오셔서 물으셨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그가 대답하기를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요 9:36)라고 대답하였다. 이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그러자 비로소 맹인이었다가 보게 된 사람이 "주여, 내가 믿나이다"(요 9:38)라고 고백하였다. 그의 진술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는 신앙고백이 아니다. "주여, 내가 믿으려고 합니다, 내가 믿겠습니다, 내가 믿고 싶습니다"라는 진술은 마음의 문이 열려 있는 상태이기는 하지만, 아직 믿음의 결단을 하지는 않은 상태다. 아직은 불신의 상태요 죄인인 상태요 죄사함 받거나 구원받은 상태가 아니다. "내가 믿나이다"라는 진술이 신앙고백이다. "내가 믿습니다, 내가 믿었습니다, 내가 믿고 있습니다"라는 진술은 믿음의 결단을 한 상태인 것이다.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라고 진술하는 사람을 교회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진술을 하는 사람에게 뱁티즘을 베풀어서도 안 된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신자에게 뱁티즘을 베풀며, 그러한 고백을 뱁티즘이라는 의식을 통해 행동으로 순종하는 신자를 교회로 받아들여야 한다.

위의 "질문과 답변"(Q&A)에서 보았던 것처럼 교회를 "택함 받은 자들"(The Elect)의 공동체라고 정의하면 교회의 개념이 모호해져 버린다. 택함 받은 자들이 누구인지는 하나님만이 아실뿐 인간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교회를 그렇게 정의할 때, "장차 택함 받을 자들"까지도 교회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갓난아기나 어린 아이에게 유아뱁티즘을 베푸는 것이 정당화되고 있는 것이다. "장차 택함 받을 자들"과 "장차 믿게 될 자들"은 아직은 예수 믿은 신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교회당(church building) 안에 들어와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함께 교제에 참여하고, 함께 기독교적인 활동에 열심을 낸다고 할지라도 아직은 교회(church)가 아닌 것이다. 신약성서가 말하고 있는 교회는 회개하고 예수 믿어 영적인 출생(spiritual birth, 거듭남 born-again)을 경험한 신자들의 공동체인 것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인사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고전 1:2). 영적인 갓난아이들이 많아 시기와 분쟁과 갈등이 심했던 고린도교회조차도 "성도(saints)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 즉, 신자들(believers)로 이루어진 공동체였고, 비록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교회였지만 하나님의 교회였던 것이다.

필자에게는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회에서 교회회원(Church Membership) 개념이 없거나 매우 희박한 것이 심히 안타깝다. 처음 교회당에 출석한 방문자나 전도대상자를 신앙에 관한 점검도 하지 않은 채,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적으로 만나지 않은 불신자임에도 불구하고, 교적부에 그의 이름을 올리는 것은 교회타락의 첩경이다. 교회당에는 왔지만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면, 그는 여전히 전도대상자(prospect)요 방문자(visitor)요 손님(guest)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주일학교나 성경공부반의 회원으로 등록될 수는 있을 것이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 뱁티즘을 통해서 분명하게 신앙고백을 한 신자가 교회회원이 되는 것이고 그의 이름이 교회회원 명부(교적부)에 등록될 수 있는 것이다.

유아세례를 행하는 교회에서는 10대 초반에 입교(入敎)라는 절차를 거치는데, 입교후보자에게 기독교적인 지식이나 성경적인 지식을 확인하는 것으로 그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다. 머리로 지식적 동의(intellectual assent)로 믿는 믿음이나 현실적인 필요를 채움받고자 하는 현세적인 믿음(temporary faith)은 결코 "구원하는 믿음"이 될 수 없다. "구원하는 믿음"(Saving Faith)이란 전인격적으로, 지성(知)과 감성(情)과 의지(意)로, 체험적으로, 그리고 가슴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encounter with Jesus Christ by heart)이고 그 분을 영접하는 것(receive Him in the heart)이다. 입교후보자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거듭남의 체험(born-again experience)이 있는지를 철저하게 확인한 후에 그 이름을 교적부에 올려야 하겠다.

신자의 뱁티즘을 행하는 교회에서는 목회자가 침례대상자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그 분이 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는지 왜 부활하셨는지를 묻고, 그 분을 자신의 "구주와 주님"(Savior AND Lord)으로 확실히 믿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가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는지를 확인한 후에 침례를 베풀어야 한다. 침례를 베풀기 전에 침례후보자로 하여금 회중 앞에서 자신의 구원체험을 간증하도록 하는 것도 자신의 신앙고백을 확실하게 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성서적인 의미의 침례(immersion)는 침례를 베푸는 성직자의 의식이라기보다는 침례받는 자의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침례후보자가 이미 예수를 믿은 신자들(교회회원들) 앞에서 "저도 회개를 하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저의 옛 사람이 죽고 옛 성품과 옛 습관을 장사지내고, 이제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며 새로운 피조물로서 새로운 삶을 살기로 했습니다. 저도 여러분의 신앙공동체(교회)에 가입하여 회원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선언하는 의식이 침례인 것이다.

3. 목회자의 도덕성과 평등의식

목회자들이 깨끗한 도덕성과 함께 민주적인 평등의식을 가져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하지만, 특히 목회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부르심을 받은 "성별된 종들"(Separated Servants)이다. 목회자들이 타락하면 교회 역시 타락할 수밖에 없으며, 목회자들의 성화 없이는 교회의 성화를 기대할 수 없다. 최근에 일어난 세월호 침몰사고에서 지도자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든 사람들이 뼈저리게 느꼈다. 모든 승객들과 선원들의 안전을 책임진 선장 한 사람의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행동으로 인하여 304명의 소중한 인명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만 것이다. 좁게는 지역교회의 목회 지도자로서, 넓게는 한국교회의 영적인 지도자로서, 목회자들은 깨끗한 도덕성(morality), 다시 말해서 높은 차원의 인격(integrity)을 갖추어야 한다.

금그릇, 은그릇, 나무그릇, 질그릇, 어떤 종류의 그릇이든, 그리고 고급스럽고 값비싼 그릇이든 저급하고 값싼 그릇이든, 그것이 "깨끗하지 아니하면"(딤후 2:20-21) 그 그릇에 음식을 담을 수 없다. 목회자는 날이면 날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어보며 자신을 성찰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하겠다. 특히 성(sex), 돈(money), 권력(power), 명예(fame) 등의 문제에 있어서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목회자부터 항상 성령충만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매일 성령께서 주인되셔서 그 분의 인도하심과 다스림을 받는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 목회자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실수를 할 수도 있고 죄를 범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깨어지기 쉬운 연약한 그릇임을 자각하며,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코람 데오, Quoram Deo) 항상 겸손하여야 한다. 자신의 양들을 맡기신 하나님께서는 어느 다른 그리스도인들보다도 목회자에게 무거운 사명감을 주셨고, 따라서 그에 따른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요즈음 한국교회를 비판하면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이 중대형교회 목회자들의 권위독점과 교회운영에 있어서의 독단적인 횡포다. 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하고 재정적인 안정을 누리기 시작하면, 담임목회자가 교회를 자신의 왕국으로 생각하고 자신을 왕국의 통치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것처럼 큰 착각은 없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이지 결코 인간 어느 누구의 교회가 아니다. 예수님도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 16:18)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또한 승천하기 직전에 예수님은 자신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시고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요 21:15), "'내 양'을 치라"(요 21:16), "'내 양'을 먹이라"(요 21:17)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예수님께서 교회를 제자 베드로에게 맡기고 승천하시면서, 교회는 "베드로의 양(들)"이 아니라 "자신의 양(들)"임을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반복하며 강조하신 것이다.

목회자는 교회 내에서 목사나 전도사나 담임목회자이기 이전에, 지역교회(Local Church)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몸에서 하나의 지체(肢體)라는 의식을 먼저 가져야 한다. 교회를 구성하는 한 사람의 회원(one of the church members)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담임목회자의 직분을 받아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담임목회자는 모든 교회의 지체들 위에 군림하여 권력을 행사하는 권위를 가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수제자 베드로는 동료 장로들(목회자들)에게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 not lording it over those entrusted to you, but being examples to the flock)고 권면하셨다.

영적인 지도력(spiritual leadership)은 섬김을 받으려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섬기려는 데서 나오는 것임을 명심해야 하겠다. 예수님도 섬기려고 오셨는데(막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목회자가 섬김을 받고 군림하고 권력을 휘두르려고 해서야 되겠는가? 따라서 어느 누구보다도 목회자에게는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교회회원들이 하나같이 소중하며 모든 교인들이 상호평등하다고 하는 민주의식이 요구된다. 단지 사역과 직분에 따른 책임의 크기가 다를 뿐이다. 더 많은 책임을 떠맡은 자는 더 많은 섬김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계속)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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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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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학 7] 중세교회 대중들의 신앙생활

중세의 신학은 기본적으로 스콜라주의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의 삶과는 거리가 있었다. 스콜라주의 문헌들은 라틴어로 쓰여졌는데, 이것을 읽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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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학 6] 중세 신학의 대략적 지도: 서방의 '스콜라 신학'과 동방의 '비잔틴 신학'

'중세 신학'이라는 용어는 통상 이 시기의 서방 신학을 가리킨다. 지리적으로는 유럽 지역이다. 초대교회 신학은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에서 시작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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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학 5] 서구 그리스도교 신학의 터전을 마련한, 아우구스티누스!

"서방신학은 동방신학보다는 출발이 좀 늦었으나 곧 테르툴리아누스, 키프리아누스, 암브로시우스 등의 교부들이 주축이 되어 착실하게 발전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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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학 4] 카르타고 학파의 거침없는 변증과 교회론

"테르툴리아누스와 키프리아누스의 신학을 오늘날 살피는 것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이들의 신학은 현실적이고 참여적이고 실존적이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