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하나님을 믿어라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이사야 56장 1-8절, 마가복음서 11장 12-26절

[니케아 신경과 가을 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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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 김진한 기자)
▲한문덕 생명사랑교회 목사

제가 여러분에게 종종 소개해 드렸던 니케아 신경의 첫 부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한 분이신 성부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전능하셔서, 하늘과 땅과, 이 세상의 보이고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셨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사도신경의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보다 더 좋아하는 편입니다. 왜냐하면 니케아 신경이 하나님의 유일성을 더 드러내고, 이 세상의 보이고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셨다는 말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더욱 풍성한 의미를 우리에게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참으로 유일하신 하나님이시요, 그밖에 다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지위에 오를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도 지으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보이는 것만 보고 산다면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반밖에 못보고 사는 것이 되지요. 그리고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을 하나님처럼 생각한다면 바로 그것이 우상 숭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언제나 보이는 것의 유혹을 넘어서고,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을 사는 현대인들은 온갖 정보들이 쏟아져 나오기에 우리의 눈과 귀는 정보의 홍수 속에 파묻혀 어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또 왜 이렇게 할 일들이 많은지 우리들의 몸은 쉴 새가 없습니다.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그렇게 일주일이 후딱 지나고, 어느새 1년도 다 가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날 우리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때로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매우 중요한데도 눈앞에 당장 보이는 것만 좇다가 많은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안도현 시인의 <가을 엽서>라는 시가 있습니다.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지난 주 화요일에 권사님들과 산정호수로 나들이를 다녀왔는데, 낙엽이 어찌나 예쁜지 저도 모르게 간직하고 싶어서 계속 휴대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만, 오늘 안도현 시인은 낙엽이 낮은 곳으로 내려앉는 모습을 보면서 제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있습니다. 시인은 아래로 아래로 내려앉는 낙엽을 보면서 사랑은 언제나 낮은 곳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또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그래서 이 시를 읽을 때 우리의 마음이 참 따뜻해집니다.

일주일 동안 열심히 살다가 주님의 날 여기에 오신 생명사랑 가족 여러분! 예배를 통해 여러분의 마음이 따듯해지길 빕니다. 오늘 하루는 하나님의 품 안에서 쉬면서 분주한 마음은 잠시 내려놓고,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 살피지 못했던 것을 보고 살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배가 여러분의 바쁜 일상을 잠시 멈추고 지난 일주일의 삶을 다시 성찰하는 시간이 되길 빕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주기적인 점검이 매우 중요합니다. 매우 다양한 요소들이 성공과 실패를 좌우한다는 것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압니다. 사업을 하든, 어떤 기관에서 일을 하든, 집안일을 하든, 공부를 하든, 심지어 여행을 하든, 더러는 멈춰야 합니다. 멈추어 서서, 우리가 가진 자원과 도구를 점검하고 필요한 것들을 제자리에 정리하고, 올바른 사용법을 이해해야 합니다.

주일예배는 잠시 세속의 삶을 멈추고 우리들의 영적인 삶과 감각을 점검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됩니다. 주일에는 멈추어 서서, 바쁘게 돌아가는 표면적인 일상에서 잠시 물러나, 삶이 뿌리내린 그 단단한 근원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들에 대해 숙고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 중 반드시 필요한 것, 가지런히 해서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과 어지럽게 마구 쌓아놓은 잡동사니, 부스러기를 구별해야 합니다. 자! 이제 숨을 깊게 들이쉬고, 길게 한번 내뿜어 보십시오. 그렇게 마음을 차분히 하고 주님의 말씀을 들어 봅시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강도들의 소굴이 된 성전]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서에는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사건이 들어 있고, 이어서 알듯 모를 듯한 예수님의 말씀들이 이어집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출발하실 때에 배가 고프셨습니다. 그런데 마침 저 멀리에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있었고, 그것을 보신 예수님은 열매가 있을까 하여 가까이 갔지만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제부터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먹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라고 거의 저주에 가까운 말씀을 퍼부으셨고, 그 무화과나무는 뿌리째 마르게 됩니다(20절). 유월절은 무화과가 익을 시기가 아니고, 그래서 마가복음은 무화과의 철이 아니었다고 보도를 하는데도, 예수님은 자신이 배고픈데 열매가 없는 것에 실망하여 즉각적으로 화를 내시고, 그렇게 해서 아무 잘못도 없어 보이는 무화과나무를 죽여버립니다. 그래서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트 럿셀은 『왜 나는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에서 이 구절을 예로 들어 제 감정을 못 추스르고 파괴적인 행위를 일삼는 예수를 믿을 수 없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가 오늘 설교를 시작하며 말한 대로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못한데서 생기는 오해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과 동일한 사건을 다룬 마태복음의 본문을 보면, 성전을 심판하시는 이야기(마 21:12-17)와 무화과나무의 이야기(21:18-22)가 별도의 이야기로 분리되어 있는 반면, 마가복음은 무화과나무 이야기 중간에 예루살렘 성전을 심판하시는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마가복음이 매우 좋아하는 문학기법으로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른 이야기와 엮어서 중간에 넣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샌드위치나 햄버거를 먹을 때, 내용물을 감싸고 있는 빵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에 더 관심을 가지듯이, 오늘 마가복음서는 성전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하고 싶어서 무화과나무 저주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와 함께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나무(이사야5:7, 예레미야8:13)로 쓰였습니다. 예레미야 8장 13절에 보면 이런 예언의 말씀이 나옵니다. "나 주의 말이다. 그들이 거둘 것을 내가 말끔히 거두어 치우리니, 포도덩굴에 포도송이도 없고, 무화과나무에 무화과도 없고, 잎까지 모두 시들어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준 것들이 모두 사라져 버릴 것이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과 유다에 대한 심판의 말씀을 했던 전형적인 예언자인데, 바로 이 말씀을 하기 위해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상징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오늘 마가 또한 무화과나무를 통해 예루살렘의 상황을 말하고자 합니다. 무화과나무가 잎만 무성했듯, 예루살렘 성전은 겉만 번지르르 하였습니다(막 13:1). 예루살렘의 가장 핵심은 썩어 문드러져 있었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저주에 따라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말라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무화과나무의 철이 아니었다라고 번역된 부분의 철, 절기의 원어는 일반적인 시간을 나타내는 크로노스가 아니라 질적이고 매우 종교적인, 결정적 순간을 나타내는 카이로스입니다. 그러니까 무화과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특별한 그 때에 자신의 열매를 준비했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그 때에 예루살렘이 올바른 신앙의 열매를 준비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들어가 보니, 모든 만민이 기도해야 하는 그 집이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뜰에서 팔고사고 하는 사람들을 내쫓고,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십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했듯, 예수님이 분노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와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는 곳이었습니다. 바로 이곳은 죄인이 새사람으로 갱생하는 곳이며,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소외되었던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는 곳입니다. 제사를 지내고 죄의 용서를 받으면 모든 낙인과 억압에서 풀려나서 일상적인 생활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제사를 지내려면 형편에 따라 염소나 비둘기를 준비해야 했고, 성전세와 헌금을 드리기 위해서는 돈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성전에 있는 제사장들은 이것을 빌미로 장사를 했습니다. 순례객들이 가지고 오는 비둘기에는 흠이 있다고 트집을 잡아 성전에서 판매하는 비둘기를 다시 사게 하였고, 성전세를 드리는 돈은 로마 황제의 얼굴이 그려져 있지 않은 유대의 돈으로 바꾸어야 하는데, 그것을 바꿀 때 엄청난 이윤을 챙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강도들의 소굴이 되었다고 예수님께서 비판하신 것입니다.

제가 심방을 하면서 새 교우 한 분에게 우리교회의 장단점을 말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상 외의 대답이 나왔습니다. 대형교회를 다닐 때는 주일에 일부러 비싼 옷을 골라 입어야 했고, 자신의 차를 교회 주차장이 아닌 먼 곳에 대야 했는데 우리 교회를 다니면서는 그럴 필요가 없어서 좋다는 것입니다. 대형교회 안에 이미 돈 많은 사람들을 우대하는 분위기가 가득했고, 또 그런 것에 신경을 써야 했는데 우리 교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성전 심판]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서에서 더 놀라운 구절은 예수님께서 성전 뜰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는 것을 금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에서 행하는 속죄 제사 행위 자체를 금지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제사 도구들을 들고 뜰을 지나다니며 옮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런 금지 명령을 하셨다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더 이상 하나님의 속죄의 능력이 베풀어지는 곳이 아님을 천명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예수님이 성전에서 하신 일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성전에 대한 심판을 내리신 것이고, 지금 성전이 하고 있는 모든 일이 불법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심판하셔서 다시는 그 나무가 열매를 맺을 수 없었듯이 실제로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에 벌어진 유대-로마 전쟁으로 인해 예루살렘 성전 또한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이런 역사적 사건을 그리스도인들은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버린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겼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구약의 말씀에 보면 성전은 어떤 곳이어야 합니까? 이방 사람이라도, 이스라엘 백성의 총회에 들어갈 수 없다고 낙인찍힌 고자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들어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이미 성전은 특정한 계층의 이익에 종사하는 배타적인 곳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그래서 성전은 심판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오늘 마가복음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그 외관에서 볼 때 으리번쩍한 건물과 수많은 교인과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어 대단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한 것이라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라고 해서 안심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참된 신앙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라]

제자들이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이 사실을 예수님께 알리자 예수님은 선문답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그 말씀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 둘째 기도하면서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는 것, 셋째는 기도할 때 서로 등진 일이 있으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진짜 하고 싶은 말씀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제목도 <하나님을 믿어라>라고 달았습니다. 오늘 마가복음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묻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고, 자신들은 하나님께 제사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믿는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그들은 무엇을 믿었던 것일까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자 많은 이들은 신앙의 구심점을 잃고 방황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마가복음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나서야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라 여기고 이제 제대로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진정으로 이 부분을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가 믿은 것은 대체로 우리 자신의 신념이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보다 인간이 만든 기독교의 교리체계를 떠 받들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목사나 장로, 다른 교인들을 믿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하나님과 예수님께 실망한 일이 없는데도 우리는 사람에게 실망하고 자신들의 신앙을 버리는 일들을 숱하게 보아 왔습니다. 그러니까 실은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사람을 믿었던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나고 믿는 일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마가복음서는 하나님과 소통을 뜻하는 기도와 사람들 사이에서의 완전한 소통과 화해를 이루는 용서야말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의 징표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가족 여러분! 하나님은 교회보다 크신 분입니다. 당연히 그리스도교보다도 크십니다. 심지어 성경말씀보다 크신 분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동안 하나님을 그리스도교 안에 가두어 놓았고, 교회 안에 가두어 놓았고, 성경 안에 매어 놓았고, 심지어 자기 안에, 더 가관인 것은 자기의 욕망 안으로 하나님을 축소시켜 놓았습니다. 그래서 잘 생각해 보면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 자신의 신념, 자신의 교회, 기독교라고 생각되는 어떤 것을 하나님인 것처럼 여겨왔습니다.

진정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떻게 보이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을까요? 예수 믿고 부자 되면 그것이 하나님을 잘 믿었다는 증거인가요? 예수 믿고 병 나으면 그것이 하나님을 잘 믿은 표식인가요? 때론 그렇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들에게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당신의 일을 해 나가십니다.

김옥선 선교사님께서 저 마다가스카르에서 아미학교를 운영하려면 꽤 많은 비용이 들어갑니다. 초반에는 거의 개인들의 후원으로 운영하다가 지금은 학생들의 학비도 있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예전보다는 조금 나아졌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어렵습니다. 후원이 없거나 등록금을 내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아져서 학교 운영이 어려워지면 거기에서 일하는 선생님과 여러 직원들에게 사례비를 주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또 그분들은 굶어야 하는 상황이 됩니다. 이런 어려움에 직면하면 김옥선 선교사는 눈물로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한번은 또 그런 일이 발생해서 무작정 하나님께 매달려 일주일을 작정하고 금식기도에 들어갔습니다. 1,000만 원 가량이 필요했는데, 어디서도 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금식기도를 마치던 날, 전혀 알 수 없는 곳에서 전화 한통을 받게 됩니다. 그 사람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돈을 좋은 곳에 사용하고 싶어서 기도를 했더니만 환상 중에 아미음악학교가 보이고, 그곳을 도우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정말 놀랍게도 남들은 전부 우연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딱 1,000만 원이 채워집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 맡기고 사는 사람들은 이런 경험들을 참 많이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없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실 때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참 믿음일까요? 그렇게 해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을 안 믿을 건가요? 어쩌면 하나님이 아무것도 해주시지 않을 때에 믿는 것이 더 깊은 믿음이 아닐까요?

제가 지난 6월 4일 설교에서 한국에 왔던 몰트만이라는 신학자를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이분은 세계적인 신학자이자, 루터파목사이기도 한데, 그분이 그때 진정한 종교개혁자들은 루터의 후예가 아니라 재세례파들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바로 이들의 역사를 기록한 『순교자들의 거울』(The Martyrs' Mirror)에 더크 윌렘스(Dirk Willems)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실한 재세례파 신앙인으로서 살았던 그는 1569년 교황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의 혹독한 핍박을 피하여 도망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당시 재세례파는 광신자나 이단으로 몰려 잡히면 화형이나 투석형, 교수형을 당하였습니다. 그가 어느 날 네덜란드의 아스페렌(Asperen) 지역에서 개혁주의자들에게 쫓기고 있었습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도망을 쳤습니다. 마침 그때가 한 겨울이었고, 그는 꽁꽁 얼어붙은 강을 건너서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그를 쫓아오던 개혁파 사람 하나가 더크처럼 꽁꽁 언 강을 타고 달려오다가 덜컹 얼음장이 깨져 버렸습니다. 그는 강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소리쳤습니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다급한 외침과 함께 개혁파 사람은 점점 물속에 잠겨들고 있었습니다. 더크 윌렘스는 어떻게 했을까요? 이 때 더크는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명하시는 것은 생명을 살리라는 것이다." 그는 망설임 없이 자기를 잡으려고 쫓아온 그를 살립니다. 강물에 빠졌다가 더크 윌렘스의 도움으로 살아난 그 사람은 어떻게 했을까요? 이 사람은 더크 윌렘스를 개혁파 사람들에게 넘기고 더크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우리는 무엇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까요?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이의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질문의 대답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반대로 물어봅시다. 어떤 모습이 하나님을 배반한 것일까요?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가 자기 아들 김하나 목사에게 교회를 세습하면서 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라고 했다는데, 정말 김하나 목사의 믿음이 깊고 커서 큰 십자가를 진 것일까요? 그래서 10만 명의 성도가 있는 교회, 비자금으로 800억이나 모으는 교회를 세습 받는 것일까요? 우리는 어떤 시점에서 타락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믿음이 어느 새 우상숭배로 왜곡되는 것일까요?

이라크 바즈라 출신의 라비아라는 여성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주님, 제가 주님을 섬기는 이유가 지옥의 두려움 때문이라면 저를 지옥에서 불살라 주시옵고, 낙원의 소망 때문이라면 저를 낙원에서 쫓아내 주옵소서. 그러나 그것이 주님만을 위한 것이라면 주님의 영원한 아름다움을 제게서 거두지 마옵소서."

전 세계의 21억 명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무엇을 기도하며, 또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스스로 어떤 노력을 하고 성찰을 할까요? 저와 여러분은 각자가 생각하는 기준이 있고 또 그래서 애써 노력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저 자신이 제게 던지는 질문을 하고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이런 질문들이 저를 더욱 하나님 앞으로 가게 한다고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나는 얼마나 밝은가? 나는 얼마나 맑은가? 나는 얼마나 넓은가? 나는 얼마나 깊은가? 나는 얼마나 기쁜가? 나는 얼마나 굳센가? 나는 얼마나 공정한가? 나는 얼마나 따뜻한가? 나는 얼마나 평화로운가? 나는 얼마나 조화로운가? 나는 얼마나 지혜로운가? 나는 얼마나 사랑하는가? 나는 좁은 길을 택하는가? 나는 고통 받는 이들의 이웃이 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만을 인하여 즐거워하는가? 나는 진정 사람다운가?"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하나님! 당신만이 우리의 참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어, 저 세상의 거센 유혹의 물결로부터 올바른 신앙을 분별하게 하여 주소서.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의 도덕성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낫게 하시고, 우리의 사랑이 그 누구보다 크고 깊게 하여 주소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날마다 당신을 닮아가는 효성스런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소서. 당신의 명령을 기억하고 그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17.11.12.)

* 여기에 들어가시면 설교 음성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cafe.daum.net/SoulLoveCommunity/UkVO/337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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