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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하는 인간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창세 33장 1-9절, 마태 6장 9-15절, 에베 4장 31절-5장 2절

[진실로 사랑하기 원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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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김진한 기자)
▲한문덕 생명사랑교회 목사

요 며칠 날씨가 꽤 맑고 깨끗합니다. 하늘도 높고 푸르고, 저 멀리 우뚝 솟은 산도 매우 잘 보입니다. 저 하늘과 산을 볼 때마다 제 마음도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과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잠시 산책을 하노라면 세상을 다 얻은 양 기분이 매우 좋습니다.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을 맞이하며 우리의 신앙도 살찌고, 높이 솟기를 기대합니다. 모든 것이 풍성하게 열매를 맺는 이 때, 우리들의 신앙의 열매도 점점 더 무르익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서 본문은 모두 용서와 관련된 구절들입니다. 지난 8월 6일 설교에서 용서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았는데, 오늘도 또 한 번 성찰해 보려고 합니다. 용서란 사랑의 완성이고, 용서야말로 참된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를 구별하는 가장 핵심적 가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지난번에도 말씀 드렸지만 용서는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것 중에 하나이고,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 용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훈련하지 않으면 실제로 행하기 어렵습니다. 여러분에게 시 한편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라는 시입니다.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정호승

나는 왜 아침 출근길에/ 구두에 질펀하게 오줌을 싸놓은/ 강아지도 한 마리 용서하지 못하는가/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구두를 신는 순간/ 새로 갈아 신은 양말에 축축하게/ 강아지의 오줌이 스며들 때/ 나는 왜 강아지를 향해/ 이 개새끼라고 소리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가/

개나 사람이나 풀잎이나/ 생명의 무게는 다 똑같은 것이라고/ 산에 개를 데려왔다고 시비를 거는 사내와/ 멱살잡이까지 했던 내가/ 왜 강아지를 향해 구두를 내던지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은 일이라는데/ 나는 한 마리 강아지의 마음도 얻지 못하고/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진실로 사랑하기를 원한다면/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윤동주 시인은 늘 내게 말씀하시는데/ 나는 밥만 많이 먹고 강아지도 용서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인생의 순례자가 될 수 있을까/

강아지는 이미 의자 밑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다./ 오늘도 강아지가 먼저 나를 용서할까봐 두려워라

이렇게 용서란 참으로 행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용서란 가해자의 잘못에 대해 피해자가 선택하는 것이기에 피해의 규모에 따라, 가해자의 태도에 따라 용서할 때가 있고, 정의를 세워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저는 종종 여러분과 함께 용서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지난번에는 우리 모두는 실수하는 존재이고, 그런 존재를 무한히 품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느끼고 체험할 때, 다른 사람의 실수, 특별히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자매의 실수에 대해서 용서의 가능성이 생길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은 또 다른 각도에서 용서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무조건 용서해야 하는가?]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의 본문은 참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원수처럼 지냈던 형제가 20년 만에(창 31:38) 서로 화해하고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우는 모습에서 우리는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구나 자기 형제나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을 때 행복하고 편안합니다. 복수하려는 앙심을 마음에 품고 사는 삶은 불행한 삶이고, 미워하는 감정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해치기 때문에 곧 자신의 인생도 상처를 입게 됩니다.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로 태어나 그 누구보다도 친밀하게 서로를 챙기며 살 수 있었지만, 장자권을 차지하려고 야곱이 형 에서를 속이면서 형의 원한이 깊어졌고, 도저히 함께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죽이려는 형을 피해 외삼촌 라반에게로 피했던 야곱은 20년이 지난 뒤에야 다시 형을 만나러 가게 됩니다.

자신 또한 외삼촌에게 여러 번 속임을 당했던 야곱은 자신이 한 잘못을 깊이 알고 있고 형에게 용서를 빌겠다고 다짐하지만 부하 400명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 형이 자신과 가족들을 죽일까봐 몹시 두려워하고 걱정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형에게 줄 선물을 가득 준비해서 자기보다 앞서서 네 차례나 보내고, 밤을 새워가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형을 만났을 때, 일곱 번이나 땅에 엎드려 절을 합니다.

오늘 장면을 통해서 우리는 용서에 앞서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바로 깨닫는 것입니다. 에서가 배고팠을 때 장자권을 우습게 여기고 팥죽 한 그릇에 팔겠다고 한 것도 실수이지만, 그것을 빌미삼아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빼앗은 것은 야곱의 잘못이 분명합니다. 그 짓이 매우 비열하였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형 에서의 분노는 당연한 것입니다. 올바르지 못한 일을 했을 때, 그것에 대해 제대로 징계하지 않고, 그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지는 일 없이 용서하는 것은 가해자를 돕게 되고,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하게 됩니다. 그러면 원래 용서가 지향했던 것, 즉, 피해자의 용서를 통해 가해자가 회개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려는 용서의 목표가 달성되지 않습니다. 가해자는 자신의 잘못을 잘못이라 여기지 않고 계속 죄를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반드시 정의를 세우는 일과 함께 이루어져야 하고 정의를 세우는 일이 없이 용서를 남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고(故) 김대중 대통령께서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서 강연할 때의 일입니다. 한 일본인 학생이 질문을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 많은 나라들이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그렇지만 이들 나라들은 지금 모두 종주국과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 그런데 왜 한국은 옛날을 잊지 못하고 아직도 일본과 화해를 하지 않는가?"

장내는 이 질문에 공감하는 듯한 분위기로 술렁댔습니다. 그 때 김대중 대통령은 이렇게 답합니다.

"도리어 나는 당신에게 되묻고 싶다. 영국과 프랑스는 수많은 과거 식민지 국가들과 사이좋게 지내는데, 일본은 왜 과거 식민지였던 한국과 잘 지내지 못한다고 생각하느냐? 그 책임이 한국과 일본 중 어디에 있는가를 한번 생각해보자. 그것은 영국, 프랑스와 일본을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일본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한국인이 생명과 같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성(姓)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했다. 또 일본은 한국말과 역사를 못 배우도록 했다. 매일 일왕이 있는 동쪽을 향해 큰절을 하도록 강요했다. 언제 영국과 프랑스가 이런 일을 한 적이 있는가?

이번에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전쟁 범죄를 같이 저지른 독일과 일본의 태도를 비교해보자. 독일은 과거에 대해 철저히 사죄했다. 유태인과 이스라엘에 수십억의 배상과 보상을 했다. 그런데 일본은 단 3억을 주는 것으로 끝내버렸다. 독일은 그들의 죄상을 어린이부터 전 국민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교육을 시키는데 반해 일본은 대부분 은폐하려 한다. 그러니 당신도 과거를 몰라 질문하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독일은 전쟁에 진 것을 '패전'이라고 시인하는데, 일본은 '종전'이라는 표현을 쓴다. 독일은 당시의 연합군을 '점령군'이라 했는데 일본은 '진주군'이라 한다. 일본식대로라면 누가 전쟁에 승리했고 누가 항복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 일본이 이러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 우리가 일본을 믿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초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일본이 이렇게 반성과 시정을 하지 않고 있는데 주변국 한국이 이를 경계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따라서 나는 이러한 일본을 결코 영국과 프랑스와 같이 취급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강의가 끝나자 일본인 학생은 김대중 대통령을 찾아와 자신은 자신의 나라가 정말 그런 줄 몰랐다며 진심으로 사과했고, 자신이 본국에 돌아가면 자신의 나라의 정책을 시정하도록 노력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일본인 학생은 양심적이었지만 일본 정부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단 한 번도 공식적인 진정어린 사과를 한 적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용서를 운운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용서도 때와 장소, 경중(輕重)이 있는 것입니다. 일본을 예로 들었지만, 우리나라의 근현대의 역사 속에서 친일파들이 행한 매국적인 행위들, 좌익과 우익의 다툼 속에서 저질러진 온갖 만행들, 공권력의 이름으로 자행된 국가 폭력들, 자신이 권력을 잡기 위해 제 나라 국민에게 총질을 해대고, 국가를 이용하여 수익을 창출하고 온 국민을 도탄에 빠뜨리는 죄를 범한 이들에 대해 용서를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용서를 말하는 것이 누군가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고, 국민의 삶을 파탄으로 몰아넣기 때문입니다.

[용서에 필요한 합리성]

따라서 우리는 바르게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용서해야 할 시기와 방법 등을 제대로 성찰할 수 있는 합리성을 키워야 합니다. 피해를 입었을 때,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복수를 하고, 그렇게 해서 폭력의 악순환의 고리가 이어지도록 해서는 안 되겠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용서를 남발하여 가해자의 범죄를 끊어내지 못하고 계속 피해자를 양산하는 일 또한 생겨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용서를 하는 경우에도 순서와 절차가 필요하고 그것을 사리에 맞게 처리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 3개의 바나나가 있습니다. 그리고 배고픈 사람 4명이 있습니다. 이 4명은 어떻게 바나나를 어떻게 할까요? 힘센 사람이 모든 것을 차지하는 약육강식의 세계, 독재 정권하에서는 한 사람만이 3개의 바나나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굶주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사회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은 바나나를 나눠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고 알게 됩니다. 어떻게 나누면 좋을까요? 합리적인 이성을 가지고 생각하지 못할 때는 나누어 먹긴 나누어 먹지만 많이 먹는 사람과 적게 먹는 사람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의 이성이 더 발달해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평등하기에 공평하게 나누어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이제 사람들은 더 머리를 씁니다. 그리고 누군가 제안을 합니다. 바나나 한 개를 4개의 조각으로 나누자고 말입니다. 그러면 총 12조각이 되고, 각 사람은 3개씩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12조각으로 나눌 때 각 조각을 정확하게 똑같이 나누기가 어렵습니다. 기술이 발달해서 무게를 재는 저울이 나오면 더욱 더 공평하게 나눌 수 있게 되지요. 바나나를 믹서기에 갈아서 눈금이 있는 컵에 따라 마신다면 훨씬 더 공평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양을 똑같이 해서 먹으면 정말 공평한 것일까요? 만약 이 네 명이 가족이라고 해 봅시다. 똑같은 양으로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도 좋겠지만, 치아가 부실한 할머니나, 한창 자라고 있는 아이들에게 더 많이 주는 것이 진정으로 공평한 것이 아닐까요? 아니면 바나나를 정말 좋아하시는 엄마를 위해 자녀가 때로 양보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주기도문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나님도 용서해 주시고, 남의 잘못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강조 문장을 덧붙이면서 끝이 납니다. 하나님은 완벽하게 자유로운 분이시고,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용서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하나님도 용서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 결정되는 것처럼 오늘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자유를 억압하면서까지 남의 잘못을 용서해줄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대로 오늘날 다양하고 복잡한 상황에서 무조건 용서하라, 남의 잘못을 용서하라는 말은 매우 신중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라는 말들이 악한 의도를 가지고 남을 해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잘 살펴야 합니다. 앞으로 사회는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세계가 될 것입니다. 요즘은 특히 인공지능의 발달로 상상하기 어려운 사회가 도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회적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의 의도와 다르게 나쁜 사람을 돕고, 선한 사람을 어렵게 만드는 일을 할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인간의 출현과 하나님의 관점]

올 해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이고, 종교개혁을 통해 그 이전과 전혀 다른 세계가 형성되었습니다. 오늘 이 사회에 새로운 변혁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변혁을 이끌어갈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오늘 에베소서의 말씀은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인간형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과 악의가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친절히 대하며, 모든 피조물의 아픔에 공감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의 관점에 따라 모든 것을 수용할 줄 압니다. 이 사람은 사람을 본받거나 짐승을 따르거나 물건에 유혹받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2014년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마이클 A. 오스본 교수는 "고용의 미래-우리 직업은 컴퓨터화에 얼마나 민감한가?"라는 논문을 통해 미국의 702개 직업 가운데 47%가 인공지능으로 2033년이면 사라질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또 우리나라의 고용정보원의 일자리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 앞으로 9년 뒤에는 인공지능과 로봇으로 인해 국내 취업자의 61.3%가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고 합니다. 6%가 아니라 60%입니다. 지난주에 3여신도회의 독서모임에서 2012년에 한국교회의 미래 10년을 예견한 책으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세상의 변화 속도는 미래학자들이 예견한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의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예측불가능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지금보다 훨씬 더 불안함을 많이 느끼게 될 것이고, 그럴 때 진짜 필요한 사람은 많은 것을 수용하는 능력, 즉, 사랑이 넘치는 사람, 속에 어떤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에베소서는 2000년 전 문서이지만 지금 새 시대의 인간형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바울 사도는 우리들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은 우주를 만드시고 우주를 사랑으로 이끌어 오신 분입니다. 창조절을 보내는 지금 우리는 무한한 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가 사는 세계와 우주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사랑의 수용력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작은 일에 안절부절하는 우리가 아니라 훨씬 더 큰 사람, 넓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맹자가 말하는 대장부가 되어야 하는데, 그 대장부는 무엇보다도 하늘과 땅을 품는 거대한 집에 머물고, 우주의 올바른 자리에 섭니다(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한 장의 사진을 보여 드리려고 합니다. 이 사진을 보면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사진의 제목은 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해 보자면 <희미한 푸른 점>이 될 것입니다. 같은 제목의 책도 있는데, 우리말로는 <창백한 푸른 점>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이 사진은 탐사선 보이저 1호가 1990년 6월 명왕성 부근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칼 세이건이라는 과학자는 우주 탐사선 보이저 계획의 화상 팀을 맡았고 이 사진도 바로 칼 세이건의 주도로 촬영된 것입니다. 그는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보이저 1호의 카메라를 지구 쪽으로 돌릴 것을 제안했고 실행했습니다. 그래서 지구를 포함한 6개 행성들을 찍을 수 있었고 이 사진들은 "가족사진"으로 이름 붙여졌는데, 수성은 너무 밝은 태양빛에 묻혀 버렸고, 화성은 카메라에 반사된 태양광 때문에 촬영할 수 없었고, 지금 우리가 보는 이 지구 사진은 이 "가족사진"들 중 하나입니다. 칼 세이건은 이 사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보면 지구는 특별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류에게는 다릅니다. 저 점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저 점이 우리가 있는 이 곳입니다. 저 곳이 우리의 집이자, 우리 자신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당신이 아는, 당신이 들어본, 그리고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이 바로 저 작은 점 위에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쁨과 고통이 저 점 위에서 존재했고, 인류의 역사 속에 존재한 자신만만했던 수 천 개의 종교와 이데올로기, 경제체제가, 수렵과 채집을 했던 모든 사람들, 모든 영웅과 비겁자들이, 문명을 일으킨 사람들과 그런 문명을 파괴한 사람들, 왕과 미천한 농부들이,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들, 엄마와 아빠들, 그리고 꿈 많던 아이들이, 발명가와 탐험가, 윤리도덕을 가르친 선생님과 부패한 정치인들이, '슈퍼스타'나 '위대한 영도자'로 불리던 사람들이, 성자나 죄인들이 모두 바로 태양빛에 걸려있는 저 먼지 같은 작은 점 위에서 살았습니다.

우주라는 광대한 스타디움에서 지구는 아주 작은 무대에 불과합니다. 인류역사 속의 무수한 장군과 황제들이 저 작은 점의 극히 일부를, 그것도 아주 잠깐 동안 차지하는 영광과 승리를 누리기 위해 죽였던 사람들이 흘린 피의 강물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저 작은 픽셀의 한 쪽 구석에서 온 사람들이 같은 픽셀의 다른 쪽에 있는, 겉모습이 거의 분간도 안 되는 사람들에게 저지른 셀 수 없는 만행을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잦은 오해가 있었는지, 얼마나 서로를 죽이려고 했는지, 그리고 그런 그들의 증오가 얼마나 강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위대한 척하는 우리의 몸짓, 스스로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믿음, 우리가 우주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망상은 저 희미한 파란 불빛 하나만 봐도 그 근거를 잃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우주의 암흑 속에 있는 외로운 하나의 점입니다. 그 광대한 우주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안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파멸시킨다 해도 우리를 구원해줄 도움이 외부에서 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지구는 생명을 간직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 우리 인류가 이주를 할 수 있는 행성은 없습니다. 잠깐 방문을 할 수 있는 행성은 있겠지만, 정착할 수 있는 곳은 아직 없습니다. 좋든 싫든 인류는 당분간 지구에서 버텨야 합니다. 천문학을 공부하면 겸손해지고, 인격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인류가 느끼는 자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멀리서 보여주는 이 사진입니다. 제게 이 사진은 우리가 서로를 더 배려해야 하고, 우리가 아는 유일한 삶의 터전인 저 희미한 푸른 점을 아끼고 보존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대한 강조입니다."

저 우주에 나가서 지구를 보면 이렇게 작은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작은 점 위에서 아옹다옹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눈은 이 작은 점안에 있지 않고 저 무한한 우주를 품고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도 무한한 우주가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지닌 사랑은 얼마든지 넓어지고 자라나서 모든 새들이 깃들이는 곳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이 땅에 당신의 정의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옳은 일 하는 사람이 잘되고, 그릇되게 사는 사람들은 그에 합당한 벌을 받게 하소서. 하나님의 의가 바로 세워져서 세상의 고통이 줄어들게 하소서. 그러나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는 마음 또한 허락하소서. 실수하는 인간을 대할 때 너그러움을 허락하셔서 그가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기회를 주게 하소서.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할 때 우리의 마음이 조급하지 않도록 주여! 우리와 함께 하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17.09.17.)

* 여기에 들어가시면 설교 음성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cafe.daum.net/SoulLoveCommunity/UkVO/328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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