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나사렛 예수의 대제사장 기도(II)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IV. 대제사장 기도의 일곱 가지 주제

kimyounghan
(Photo : ⓒ베리타스 DB)
▲기독교학술원 원장 김영한 박사

예수의 대제사장 기도는 그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여태까지 지녀왔던 하나님과의 내적 삼위일체적인 관계를 가장 자세하게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 예수의 영원한 원천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대제사장 기도에는 7가지 중요한 주제가 있다. 그것은 첫째, 아들이 영화롭게 되는 때: "때가 이르렀사오니." 둘째, 내적 삼위일체의 영광, 셋째, 영생: "참 하나님과 그 보내신 그리스도를 앎." 넷째, 아들의 하나님 이름 계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다섯째, 그리스도인의 본질: "저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합니다." 여섯째, 하나님 백성의 성화: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일곱째, 교회의 연합과 일치: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이다. 먼저 첫째에서 세 번째 주제를 다루고자 한다.

1. 아들의 영광(십자가에 달리심) 때: "때가 이르렀사오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신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 17:1b). 때란 구속사의 절정을 말한다. 하나님의 본체를 버리고 인간으로 성육신하신 예수가 33년 동안의 지상 생활을 하면서 복음을 전파하시고 그 목적인 십자가의 대속제물이 되는 때를 말한다. 이는 역사의 카이로스다. 바울은 로마서 마지막 구절에 복음의 사실을 다음같이 요약하고 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롬16:25-26a)

어머니 마리아를 따라서 간 가나의 혼인잔치 피로연(披露宴)에서 어머니가 아들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했을 때 예수는 말씀하셨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2:4). 여기서 때(hour)란 메시야 사역의 때를 말한다. 형제들이 형 예수를 믿지 아니하여 예수에게 유다로 가서 일하라고 제안한다: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요7:3-4). 이 제안에 대하여 예수는 다음같이 대답하면서 갈릴리에 머무신다: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요7:6-8)

여기서 "내 때"(my hour)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를 말한다. 초막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종교 권력자들이 그를 죽이려 했으나 손을 대지 못한 것은 아직도 그의 때가 오지 않았음이라고 요한은 표현한다: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음이러라"(요7:30; 8:20).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그의 때란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영광 받으시는 때를 말한다.

십자가의 달려 죽으심은 역사적 예수가 그 시대적 종교사회적 상황 속에서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이 떠나감에 따라 부득이 선택한 우연적 사건이 아니다. 슈바이처 같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의 예루살렘으로 올라감과 십자가 죽음을 세상종말이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간섭도 없는 것에 실망하여 시도한 그의 자살로 해석하려고 했다(김영한, 『정통개혁신앙에서 본 나사렛 예수』 제1권, 킹덤북스, 278-82). 이러한 해석은 구약 모세의 율법서와 예언자들의 예언서에서 줄기차게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구속의 섭리를 간과하는데서 빚어지는 것이다. 바울이 증거하는 대로 예수의 성육신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는 영원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 나타났다. 그리고 선지자들의 글에서 예언되었던 것이다. 이 대속의 때는 하나님의 인류 대속의 구원을 위하여 예정되었던 경륜이 이제 성취되는 때가 온 것이다. 예수의 대제사장 기도에서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라는 글귀의 "때"는 이러한 구속의 경륜이 이루어지는 카이로스(kairos)를 말한다.

십자가를 지는 순간은 아들이 죄수로 죽는 시간이지만, 이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분의 거룩한 대속 경륜을 이루는 시간이기도 하므로 역사의 주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는 시간이다. 아들이 하나님의 대속의 뜻을 이룸으로써 우주와 역사를 향한 하나님 창조의 뜻과 의도가 실패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이요, 하나님이 불의한 분이 아니라 우주와 역사를 정의롭게 운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리는 의미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시간이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예정에 따른 타락한 인류의 대속을 비밀의 경륜이라 칭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으심이 실현되는 "때"에 관하여 증거하고 있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엡1: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3:9),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엡3:11).

예수는 십자가에 죽으러 가는 길이 끝이 아니라 부활로 이어지는 새로운 시작이요 아버지께로 되돌아가는 길이라고 말씀하신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13). 아들은 인간이 되심으로써 신의 영광스러운 존재방식을 포기하셨다. 이제 부활을 통해서 영광스러운 존재 방식이 아들에게 다시 주어질 것이다. 아들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줄 수 있는 권세를 받으신다. 이러한 권세를 발휘하심으로써 아들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신다.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야만 신자들에게 새로운 보혜사 성령을 보내 줄 수 있으며, 성령 안에서 그들과의 사귐을 통하여 신비로운 연합(unio mystica)을 이룸으로써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자발적으로 순종하여 그 마음속에 평안을 얻고 기쁨이 충만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신자들에게 권면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2. 내적 삼위일체의 영광

예수는 대제사장 기도에서 자신의 신적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역사적 예수가 하는 일은 자기가 스스로 계획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명하신 일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17:4). 역사적 예수는 아버지의 대속 경륜을 지금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메시야적 사역을 통하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다. 아들 예수는 자기 영광을 추구하지 않고 오로지 아버지의 영광을 추구하였다. 아버지의 뜻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예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가난한 자들에게 전파하였고, 세상 의사가 고칠 수 없는 앉은뱅이, 시각장애자, 나병환자, 중풍병자, 혈루병(血漏症) 걸린 자들, 각종 질병으로 고통 받는 자들을 치유하셨고, 귀신 들린 자들로부터 귀신을 쫓아내셨다. 이러한 이적과 기사를 행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권능을 알렸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과 소외된 자들 가운데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를 나타내셨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이러한 아들의 메시야적 사역의 권능은 그가 가진 영원한 삼위일체적 원천에서 비롯되고 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5). 역사적 예수는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창세 전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를 말하고 있다. 그 영화는 무(nothingness)에서 만물을 자신을 통하여 창조한 말씀이 지닌 영화다. 창세기의 기자 모세는 하나님이 보신 창조의 영광을 다음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a).

잠언의 기자는 세상 창조 시에 일하신 창조자의 지혜를 인격화하여 묘사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잠 8:22-26)

지혜는 창세 전에 세움을 받았고, 창세 이전에 이미 났다. 지혜는 모든 피조물이 있기에 앞서 하나님과 같이 있었다. 지혜서에는 지혜에 관하여 다음 같이 묘사하고 있다: "지혜는 하나님의 떨치시는 힘의 바람이며 전능하신 분께로부터 나오는 영광의 티 없는 빛이다.... 지혜는 영원한 빛의 찬란한 광채이며 하나님의 활동력을 비쳐주는 티 없는 거울이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주는 형상이다"(지혜8:26-27, 공동번역). 유대인 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von Alexandria)는 지혜를 가리켜 "하나님의 맏아들," "하나님의 형상," "창조의 시작"이라고 칭했다.

사도 요한도 요한복음 머리말에서 지혜를 창조의 말씀으로 묘사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1-3)

사도 요한은 잠언과 지혜서가 언급한 지혜가 "창조의 말씀"이요 그것은 인격으로서 성육신한 예수라고 증언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요한은 이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증언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예수는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의 창조의 모사(謀士)가 되었다: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잠8:27-31)

그리고 지혜는 창조자로서 하나님의 기뻐하신 바 되었고 하나님 앞에 항상 즐거워하였으며 창조물을 즐거워하였고 사람들을 즐거워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논쟁하실 때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사도 바울은 역사적 예수의 대속을 창세 전의 하나님의 예정에서 설명하고 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4-5).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됨은 우리의 선택 이전에 이미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정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의 신비에 있다. 예정이란 기구한 운명이나 숙명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이성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에 입각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이성이 추적할 수 없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우주 경영의 섭리요 경륜의 신비다.

이상에서 우리는 역사적 예수가 창세 시에 하나님과 함께 가지셨던 기쁨과 영광을 통하여 창조 이전 하나님의 내적 삼위일체의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경륜의 신비 앞에 경외와 감사로 서게 된다.

3. 영생: "참 하나님과 그 보내신 그리스도를 앎"

먼저 조에(h, zwh,,, zoe)라는 생명은 비오스(bios)라는 생명과 다르다. 비오스는 물리적 생명(physical life)이다. 그러나 조에는 물리적 생명을 넘어서는 영적 생명(spiritual life)이다. 비오스는 자연적인 생명을 말하나 조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생명이다. 비오스는 물리적인 생명을 말하나 조에는 관계 안에서의 생명(life in relationship)이다. 비오스는 자연개체의 생명력으로서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그러나 조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 영생, 즉,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이란 생명 자체로서 현세에서도 살 수 있으며, 물리적 죽음을 통해 더 이상 위협 받지 않는 참된 삶이다. 복음은 비오스와 관계하지 않고 조에와 관계한다. 복음은 생명의 원천이신 그분과의 관계를 맺게 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한다. 요한은 증언한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 로고스인 예수 안에 생명이 있었고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φw/ς)으로서 어둠(σκοτία)인 세상을 비추었다.

예수는 이미 죽어 장례를 치룬 나사로의 무덤에 가셔서 보통 인간이면 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zoe)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예수는 "나사로야 나오라"(요11:43)고 말씀하시며 그를 죽음에서 살리신다. 그러나 소생한 나사로의 생명은 다시 죽을 수밖에 없는 비오스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는 물리적 생명은 죽더라도 영적 생명은 지속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적 생명은 충만하고 파괴되지 않는 생명 자체다.

그러면 물리적 생명을 가진 인간이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는가? 이에 대하여 예수는 우리에게 앎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신다.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에서 기노스코(γινώσκω, ginosko)라는 동사는 56번 사용된 반면, 그노시스(γνw/σις, gnosis)라는 명사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노스코는 '어떤 사실이나 사물을 알다, 인식하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이것이 인격체와 관계 되었을 때는 상호간의 친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기노스코는 '믿다, 거하다, 사랑하다, 빛 안에 거하다'와 같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용어다. 이에 반해서 영지란 구원을 얻는데 필요한 신비한 지식을 말한다. 요한은 이러한 영지주의적 구원 지식을 배격하였다.

"영생(h, aiwnioj zwh, eternal life)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인간은 앎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데 여기에는 구약적 앎의 개념이 전제된다. 안다는 것은 공동체를 만들고 앎의 대상과 하나가 된다. 예수는 앎을 신앙과 연결시킨다. 생명의 열쇠는 신앙적 앎이다. 신앙적 앎이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이것은 짧은 형태의 신앙고백이다. 신앙이란 앎과 연결된다. 그러나 무수한 사건이나 일들이나 현상에 대한 앎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다. 여기서 하나님 신앙은 신들이나 귀신들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영생이란 관계 속의 생명이다. 영생이란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함께 사귐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을 때 우리의 유한한 비오스는 조에를 소유할 수 있다. 이 조에(영적 생명)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다. 우리 인간은 생명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을 때 그의 생명의 진액을 받아 영생에 이를 수 있다.

하나님은 이 영생을 아들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셨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요17:2). 아들이 십자가의 대속으로 희생제물이 되셔서 모든 죄인의 죄 값을 지불하시자, 아버지는 아들을 죽음에서 일으키시고 아들을 영화롭게 하셨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줄 수 있는 권세를 주셨다. 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부여받았다. 이것이 그가 지상 사역에서 행사하신 고난의 종으로서의 메시야 사역이다. 역사적 예수의 메시야 권능적 사역의 원천은 요셉과 마리아 가문이라는 그의 인간적 출처가 아닌 그의 내적 삼위일체적 원천에서 비롯된다.(계속).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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