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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상이몽(同床異夢)

한문덕 목사 (생명사랑교회)

마가복음서 8장 27절-9장 1절, 고린도전서 1장 18-25절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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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 김진한 기자)
▲한문덕 생명사랑교회 목사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의 가이사랴에 있는 여러 마을로 가셨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어 보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전에 목회하던 교회에서 청년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청년들은 이렇게 답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요? 일단 유대인 남자고요. 목수니까 잡일들을 능숙하게 잘하실 것 같아요."

"모태신앙이라 예전 교회에서 배운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간이자 신이라고 생각했죠. 그 때에는 나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어요. 내 신앙을 고민하면서 처음 예수를 생각해 보니 그분은 혁명가더라고요. 혁명은 언제나 폭력을 동반하기 마련인데, 기존의 폭력을 동반한 혁명과는 다른 방식으로의 혁명을 보여준 분이라고나 할까요?"

"현재의 복잡한 상황, 끊임없는 갈등 속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가도록 이끄시는 분이죠."

"예수님은 마음이 따뜻하고요. 제게 천사 같은 분이시죠."

"예수님은 희망이고 가능성입니다."

"예수님 생각하면 사실은 불편하죠. 좀 바보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현실에서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좀 다혈질 같아요. 화도 많이 내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것을 보세요.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고 책상을 둘러엎은 것도 그렇고...."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다시 오늘의 본문으로 가보겠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를 들으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또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열두 제자의 대표격인 베드로가 나섰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제목의 찬송가(96장)가 있는데 거기에는 예수님에 대한 묘사가 잔뜩 등장합니다. 4절만 보면 예수님은 온 교회의 머리시고 온 세상의 구주시며, 모든 왕의 왕이고, 세상을 심판하실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이 찬송가의 한 구절처럼 예수님은 온 세상의 구주시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좀 이상합니다. 이 고백에 대해서 가(可)타 부(否)타 응답이 없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베드로가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칭찬하면서 그 고백 위에 자신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열쇠를 베드로에게 주셔서 베드로가 땅 위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는 말씀까지 해주셨는데, 마가복음서에서는 아무 말씀도 없으시고, 도리어 제자들에게 엄중하게 경고하시면서 아무에게도 자기에 관하여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앞으로는 자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충격적이고 참담한 소식을 몰래 조용히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아까 나섰던 베드로가 또 나서서 예수를 붙들고 항의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또 베드로를 꾸짖으시면서 아주 심한 말을 하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순식간에 사탄의 괴수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속사정이 있는 것일까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마가복음서의 이 일이 벌어진 곳은 가이사랴 빌립보 또는 빌립보의 가이사랴라고 불려지는 곳입니다. 빌립보의 가이사랴는 헤롯 대왕의 아들이며 갈릴래아 영주 헤롯 안티파스의 이복동기인 헤롯 빌립보가 헬몬 산 아래 지하수가 펑펑 솟아나는 자리에다 기원전 2년 경에 세운 도시입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북쪽으로 백리 쯤 되는 곳이며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선인 여기는 독립을 꿈꾸는 유대인 저항세력들이 로마가 세운 괴뢰정부, 즉, 헤롯 정권에 맞서 싸울 것인가, 아니면 외국으로 망명할 것인가를 결정하던 장소였습니다. 여기에서 남쪽 예루살렘으로 방향을 정하면 정당성 없는 괴뢰정부를 뒤집는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고, 북쪽으로 가면 이제 정부에 대한 저항 운동을 멈추고 외국으로 망명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제자들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으셨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예언자 계열의 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대변인으로 고통당하는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위로를, 잘못을 저지르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을 전합니다. 세례요한이나 엘리야, 그리고 많은 사람이 기다렸던 예언자 중의 한 사람(신명 18:15) - 이 사람은 바로 모세와 같은 이를 가리키는 것인데 -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당대의 왕권에 맞서 저항하는 목소리를 냈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아합왕과 왕비 이세벨에 맞서서 싸웠고, 세례요한은 헤롯의 잘못을 비판했으며, 모세는 대제국 애굽의 바로와 맞대결을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을 보면서 세례요한의 뒤를 이을 재야의 지도자를 떠올렸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이방 세력을 추종하던 기득권자들과 싸워 멋지게 이긴 엘리야를 생각하였으며,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처럼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 줄 훌륭한 영도자가 되어 주기를 꿈꾸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당신이 메시아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아라는 히브리어를 그리스어로 바꾼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메시아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구약성서의 메시아 사상(예레미야 23:5-6, 스가랴 6:12-13) 근거로 하늘과 땅이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아에게 순종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병이 낫고, 심지어 죽은 자들이 살아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물리칠 군사적 지도자였기에 로마 황제를 죽일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을 이스라엘 땅에서 몰아내고 이 땅을 정결케 할 다윗 가문의 메시아를 열망하였습니다. 베드로 또한 다르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거기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군을 물리치고 로마에 빌붙어 사는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들을 갈아엎고 새로운 다윗의 왕국을 건설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생각한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하신 일들을 전부 함께 체험한 사람입니다. 병자가 낫고, 나쁜 악법들을 비판하고, 아무것도 없는 빈들에서 오천 명과 사천 명이 먹고 마시고, 죽은 야이로의 딸이 일어나고, 성난 파도가 잠잠해졌습니다. 기득권자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온갖 계략과 책략을 썼지만 그런 모든 거친 물결을 밟고 걸어오시는 예수의 모습을 지켜 본 베드로는 분명 예수를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자신이 열심히 번 돈을 로마에게 빼앗기고 동생과 친척들이 로마인들에게 멸시를 당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과 하나님의 거룩한 땅이 이방 신들로 가득 차고 더럽혀졌을 때, 베드로의 이런 고백과 생각은 당연한 것일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고난을 당할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죽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만약 예수님이 죽으신다면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이지요. 군대 귀신 들렸던 사람이 고침을 받을 때, 로마 군대를 상징하는 돼지떼가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을 보면서 품었던 모든 꿈이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고 베드로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를 바짝 잡아당기고 예수님을 꾸짖습니다. 오늘 본문에 "그에게 항의하였다"라고 번역된 말은 예수님이 베드로를 "꾸짖다"라는 말과 동일한 말입니다. 서로 꾸짖는 상태가 된 것이지요. 그리고 마가복음서에서 이 "꾸짖다"는 말은 사탄을 향해서, 또는 사탄의 세력과 비슷한 사나운 풍랑을 향해서 예수님이 하시던 말씀이었는데, 그 저주를 예수님과 베드로가 서로에게 퍼 붓고 있습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은 동상이몽입니다. 이 말은 중국 남송(南宋) 때의 학자인 진량(陳亮)이 한 말로 "한 자리에서 같이 자면서도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뜻입니다. 즉 베드로와 예수는 늘 같이 행동했지만 서로의 속은 달랐던 것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자비를 말하는 대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사 55:8-9). 인간의 생각으로는 원수 같은 저 악의 무리들을 당장 물리치고 복수를 행하여 모두 없애야 정의가 이루어지고 평화의 나라가 올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 사도가 말씀하신 것처럼 십자가는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으로 보이겠지만,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각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래서 베드로에게 심한 말로 꾸짖으신 것입니다. 사탄의 생각은 바로 폭력으로 세상을 뒤집어엎으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베드로가 칼을 뽑아 말고의 귀를 베자, 예수님께서 그 칼을 다시 칼집에 꽂으라고 하시면서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할 것"이라는 말과 상통하는 장면입니다(요한 18:10-11, 마태 26:51-52). 예수님의 길은 폭력적 구원의 길이 아니라,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랑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부르셨을 때 그물을 버려두고 곧 자신의 생계를 접고 곧바로 예수를 따른 제자입니다. 예수가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도 이렇게 예수님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베드로를 혼내 주신 예수님께서 이어서 이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가르치십니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 없이, 그리고 십자가를 지는 것 없이는 자기를 따라 올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정신을 차려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이 받을 은혜를 끝까지 바라고 있으십시오. ~~ 전에 모르고 좇았던 욕망을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불러 주신 그 거룩하신 분을 따라 모든 행실을 거룩하게 하십시오."(벧전 1:13-14)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영혼을 정결하게 하여서 꾸밈없이 서로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순결한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벧전 1:22)

"정신을 차리고, 삼가 조심하여 기도하십시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불평 없이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십시오."(벧전 4:7-9)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 악마가,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악마를 맞서 싸우십시오."(벧전 5:7-9)

인용한 성서구절들은 베드로 사도가 쓴 편지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경험하고 이전 베드로의 모습이 아닌 새로운 지도자 베드로로 거듭납니다. 한 때, 자신이 생각하던 방식으로 유대 백성을 구원하고자 했지만, 그래서 예수님께 항의하고, 예수가 체포되자 예수님을 부인했지만, 이제 베드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 사람의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오늘날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또 나의 잘못된 모습을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 사업가가 영적으로 매우 뛰어난 스승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사업도 잘 되고 잘 살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사업가에게 말했습니다. "물고기가 마른 땅 위에서는 말라 죽듯이, 당신도 세상에 얽매이게 되면 멸망할 것입니다. 물고기는 물로 돌아가야 하고 당신은 고독에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사업가는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제가 사업을 그만두고 수도원에라도 들어가야 된단 말씀입니까?" "아니, 아닙니다. 사업을 계속하십시오. 그리고 당신 마음속으로 들어가십시오." (앤소니 드 멜로 <일분지혜> 21.)

우리 모두는 생명사랑교회의 교인입니다. 예배당에 모여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들으며 주님께 예배합니다. 교회의 다양한 활동도 함께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상이몽이라는 말처럼 같은 주를 모시면서 전혀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생각이 다양한 것은 당연하고 한편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양한 생각이 주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마음을 뺏긴 것이라면 그것은 안 됩니다. 욕망에 물들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생각이라면 반드시 고쳐야 합니다. 우리가 젊은 베드로처럼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의 욕망에 따라, 세상에서 배운 잘못된 생각으로 예수님을 조종하려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모든 뜻을 하나님께 두어야 하고 또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고독에 머무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다시 만나야 합니다.

[언제나 십자가를 생각하라!]

예수님의 질문에 세상 사람들이 답했고, 제자의 대표인 베드로가 답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답할 차례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예수님은 누구인가?

우리들의 대답이 예수님 당시 사람들과 같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자신의 삶의 실천이나 노력 없이 그저 모든 것을 예수님께 의존하고 예수님이 다 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이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 모세처럼 자신들을 구원해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대로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민주사회가 도래한 지금 우리는 말씀에 응답하여 책임 있게 행동하는 주체적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동시에 베드로처럼 자기 마음대로 예수님의 뜻을 바꾸려 해도 안 됩니다. 베드로는 세상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려 했습니다. 즉, 자기를 부인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면 우리는 그를 따라 가야하고, 그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자기는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서 예수에게만 십자가를 지게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방식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예수를 따른다면서 자기 욕망을 거기에 투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계속 성찰해야 합니다. 오직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집착하여 무섭게 정진하는 사람, 그 목표가 기득권을 쟁취하는 것이든, 아니면 이 사회를 변혁한다는 이상이든 간에 목표와 목적이 너무 확고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음성, 그들을 향한 다른 사람들에 배려를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되고,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무슨 방법이든지 동원하는 무서운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면서 이런 무서운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누구입니까? 예수님에 대한 자신만의 고백이 있습니까?

"서서히 그리고 부드럽게 세상 속으로 스며드는 사랑의 향기,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같은 자유인, 특별한 지위나 칭호도 없이 그저 말씀과 치유행위로 여느 랍비나 예언자들의 주장과 권위를 넘어선 인간, 계급 질서를 떠나 사심 없이 봉사하면서 보상을 바라지 않고, 적과 원수조차 끌어안는 사랑으로 끝없는 용서를 베풀었던 사람, 사제나 신학자도 아니면서 종교적 기성권력체제와 충돌했고, 정치가나 혁명가도 아니면서 정치적 세력과 대결했으며, 통상적 규범을 깨뜨렸고, 어떤 당파에도 편입되지 않았으며, 모든 규정들은 오직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라 믿었던 사람, 삶이 깊어질수록 깊이 빠져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충돌과 모험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 자신의 모든 정당성의 근거를 오로지 스스로 더없이 친밀하게 '아빠'라 부르던 하나님께만 두었던 분!"(한스 큉)

이 나자렛 사람은 인도의 신비주의와 중국의 깨달음 전통의 위대한 대표자들인 붓다와 공자와도 달랐습니다. 명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수도자나 신비가가 아니었고, 도덕적 세계질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학자나 도덕군자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모세처럼 율법을 받들어 민족의 살 길을 보여 준 것도 아니고, 무함마드처럼 성스러운 전쟁을 벌여 신정국가를 만들고 종교적인 세계 정복을 꿈꾼 사람도 아닙니다. 모세, 붓다, 공자는 모두 크게 성공한 후, 아주 고령에, 제자와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여, 이스라엘의 족장들처럼 "인생을 누릴 만큼 누리고" 죽었습니다. 무함마드도 삶의 즐거움을 한껏 누린 후, 자기 하렘(harem: 궁궐 내의 후궁이나 가정의 내실)에서 총애하던 여인의 팔에 안겨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길어야 3년, 혹은 겨우 몇 달간의 공적 활동을 하다가 한창 피어나야 할 30대 초반의 나이에 죽습니다. 제자와 추종자들에게 배반당하고, 적대자들에게는 조롱과 모욕을 당하고, 하나님과 인간들에게 버림받은 채, 가장 치욕스럽고 잔인한 처형방식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 예수가 2000년 전 동료들에게 물었듯이 오늘 우리들에게 묻습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 모두는 각기 제 삶의 방식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것입니다. 삶이란 변하는 것이고, 개별적인 것이며,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 동일한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신앙고백도 서로 다르고 신앙생활의 모습도 모두 다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예수는 누구였고, 무슨 일을 하였으며, 오늘날 우리에게 누구인가? 그리고 나에게는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 그 물음을 지속적으로 물으며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의 질문에 대답했을 때,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그 대답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찾은 한 가지 답에만 머무르기보다는 예수님을 기억하며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과연 오늘날 어떤 모습인가?"라고 끊임없이 물으며 더 나은 삶을 찾아야만 우리의 삶이 더 깊어지고 넓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의 삶과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취업전선에서 생존의 길을 찾아 분주하게 움직일 때에, 아이들 치다꺼리로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나서, 늦은 밤까지 야근하고 처진 어깨를 늘어뜨리고 터벅터벅 집으로 걸어 올 때에도, 잠시 여러분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여러분의 속을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참 자유를 얻기 위해 숨을 좀 더 죽이고 생각을 더 고요하게 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는 누구입니까? 또 예수에게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2017년 7월 23일 오늘 예수는 여러분과 함께 어떤 사건을 일으키고 계십니까?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하나님!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소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바로 알게 하소서. 바로 알아 따르게 하소서. 예수를 따르는 제자로 살지 못하게 방해하는 나의 습관들, 잘못된 가치관을 고쳐 주소서. 주님께 의지하되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책임 있는 신앙인이 되게 하여 주소서. 끊임없이 정진하고, 십자가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는 이들이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여기에 들어가시면 설교 음성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cafe.daum.net/SoulLoveCommunity/UkVO/320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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