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서광선 교수, "예수 이야기는 민중의 이야기"(2)

민중신학회 발제 "이야기와 민중, 회상과 단상: 현영학과 서남동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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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본지 논설주간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

한국민중신학회(회장 강원돈)는 2월6일(월) 오후 6시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이제홀에서 정기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서광선 교수(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이야기와 민중, 회상과 단상: 현영학과 서남동을 기리며"를 발제했다. 서광선 교수의 동의를 얻어 발제문의 전문을 전편에 이어 전재한다.

루터의 종교개혁과 독일어 성서

미국 선교사들의 선교정책과 성서 한글 번역의 역사와 일제하 기독교의 항일 운동을 연결시키면서 루터의 종교개혁을 떠올리게 된다. 루터의 이른바 3 sola(Sola fide, Sola gratia, Sola Scriptura)에서 성서제일주의(Sola Scriptura)로부터 시작된 만인사제론(萬人司祭論)을 생각하더라도 성서가 그 이야기의 종교성과 더불어 서구 정치사 및 지성사에 끼친 광범위한 영향, 그리고 서구 모더니티에 끼친 역사적 영향을 환기하게 된다. (올해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여서만은 아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열풍"을 신학적으로, 혹은 교회사적으로만 상기하는 것을 넘어서 그 시대정신과 인문학적 역사인식에서 살펴보면, "성서제일주의"가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성서근본주의를 탄생시키기도 했지만, 루터로부터 시작된 성서의 자국어 번역이 평신도 교육과 보편적 공교육, 국민교육, 그리고 나아가서 서구 근대 민주주의의 발흥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올해 출간될 예정인 사회학자 김덕영 교수의 『서양 모더니티의 기원으로서의 종교개혁』(도서출판 길)은 종교개혁에 대한 인문사회학적 접근을 시도한 책으로 많이 기대된다([한겨레] "책과 생각," 2017.01.06. 금요일, 1면).

다시 말하면, 1517년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의 시대정신은 르네상스였으며, 십자군 전쟁의 결과로 예기치 않게 중동 이슬람 문화와 접촉하게 됨으로써 서구 철학계와 신학계가 발전하게 된다.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철학의 영향을 받은 스콜라철학과 신학이 태동했고, 이들 철학과 신학을 서구 대학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리고 콜럼버스는 1492년에 인도대륙으로 착각한 아메리카 대륙에 닻을 내렸다는 사실, 그리하여 지구가 평평한 것이 아니라 둥글다는 과학적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 또한 거의 같은 해에 인쇄기술이 발명되었고, 화약을 터뜨리는 기술을 알게 되었고, 거의 같은 시기에 오늘과 같은 종이를 대량 생산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과 종교개혁을 연결시킬 때, 종교개혁은 기독교 세계의 문제만이 아니라 온 유럽의 정신세계와 지성사, 문화사, 과학사, 항해사, 정치사, 교회사, 대학사 그리고 서구 자본주의와 과학, 그리고 민주주의 혁명과 직간접으로 상호 영향을 주고받은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은 개신교의 울타리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광명 세계 안에 드러내 놓아야 하는 "혁명의 역사"로 다시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루터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함으로써, 성서를 하나님과 민중의 이야기로 민중 스스로가 읽게 하였다. 기독교 신앙은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성경은 일부 천주교 사제들의 독점물이 아니고 민중의 것, 성경을 읽는 사람의 것, 나아가서 성경을 읽는 사람은 성령과 양심의 힘으로 독자적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성서 해석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루터의 만인사제론은 성서해석의 보편화와 자유화에서 온 것이고, 성서를 국어로 읽음으로써 (독일)민족주의를 고양할 수 있게 했다. 결국 문맹 퇴치는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인식하게 했다. 모국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정치적으로 민주주의의 참정권 확대를 가능하게 하고 민주주의가 글도 읽을 줄 모르는 "우민(愚民)주의"로 몰락하지 않도록 하는데 기여한 것이다. 민중이 글을 읽음으로써 절대군주 체제가 무너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서 이야기가 민중의 이야기가 되고, 글을 읽고 이야기를 말하는 민중이 군국주의를 타파하고 민주주의 혁명을 일으킨 주역이라고 주장하는 역사적 "가설"은 이야기의 정치성과 혁명성을 확인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하겠다.

최근, 협성대학교 교회사 교수인 한정애 교수가 혜암신학연구소의 월례 강좌에서 발표한 "마르틴 루터의 공공신학적 사상"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루터의 "만인사제론"을 "만인 교육론," 즉, 보편적 공공교육론으로 확대 발전시킨 업적을 제시하고 있다. 한 교수는 그 발표문에서 루터의 두 가지 문서자료를 제시하였는데, 그 하나는 "시의회 의원들에게 그리스도교 학교를 설립 운영하도록 호소한 글"(1524)과 다른 하나는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야 할 부모의 의무에 관한 설교"(1530)이다.

한 교수가 발표한 내용을 인용한다.

"루터는 성서를 바탕으로 하여 남녀 모두를 위한 교육을 위해 교육 개혁적인 사상을 시의원들 향해 호소하며 펼쳤다. 당시 몰락해가던 수도원 학교들과 성당 학교들을 보며 교육의 필요성이 절실하고 학교 건립이 시급함을 피력했다. 그리고 그의 친구 라차루스 슈펭글러에게 사회 전체를 위해 그리고 개개인의 보수가 허락하는 직책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설교문(1530년)을 헌정했다.

또한 이 설교문에서 장학재단 설립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것이 결국 미래에 태어날 사람들에게까지 유익하고 또한 평화와 행복을 줄 것이라고 했다.... 문서들을 통한 그의 개혁활동은 구체적으로 수용되었다. 헤센의 방백 필립1세에 의해 최초의 개신교 대학교로 설립된 마르부르크(Marburg))대학교도 그 하나의 예이다. ([강연 자료집], 15)

루터의 종교개혁은 기독교 성경을 극소수 사제들의 독점으로부터 민중의 책으로 해방하기 위하여 성경을 모국어, 민중의 언어로 번역하고, 대량 인쇄술을 통해서 책으로 보급하였다. 나아가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모국어로 글을 가르치고 모국어로 책을 읽는 교육을 공공 교육, 교육의 보편화, 의무화로 진전시켰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은 종교의 개혁으로 그친 것이 아니었다. 종교개혁은 성경의 모국어 인쇄와 보급, 그리고 모국어 공공교육은 서구와 세계의 모더니티를 탄생시킨 것이다. 민중의 이야기는 역사를 만들어 낸다.

스토리텔링 애니멀 (The Storytelling Animal)

앞에서 밝혔지만,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작년 마지막 민중신학회 모임에서 감신대 박일준 교수의 발표를 경청하고 그가 소개한 두 권의 책을 통독하게 된 것이다. 그 두 권의 책은 브라이언 보이드 지음, 남경태 옮김, 『이야기의 기원』 (Brian Boyd, On the Origin of Stories)과 조너선 갓셜 지음, 노승영 옮김, 『스토리텔링 애니멀』 (Jonathan Gottschall, The Storytelling Animal)이다. 특히 갓셜의 『스토리텔링 애니멀』은 이야기를 민중의 것으로만 인식하여 논의하지 않고 인간 본성과 연결시켜 "보편화"시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책은 철학적, 혹은 문화적,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진화사회학적" 인간학으로 이야기를 논의한 것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이야기로 생존하고 진화하는 동물이라는 것이 기본 전제이다. 이야기는 인간의 보편적 존재양식이고 생존 기술이며 수단이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스토리텔링 애니멀』의 저자 갓셜이 이 책의 책머리에 엘리 위젤의 『숲의 문』이란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신은 이야기를 사랑하여 인간을 만들었다." 나는 바로 그 밑에 "인간은 이야기를 사랑한 나머지 신을 만들었다"고 썼다. 내 말이 너무 인본주의적이고 반(反)신학적이라면, "신은 이야기를 사랑하여 인간을 만들었더니, 인간들은 자기네 이야기를 만들고 신의 말씀이라고 했다"로 고쳐 써도 되는지 묻고 싶다.

갓셜은 이야기의 구조를 인간 지능의 "기억"과 "상상력"으로 분석하면서 이야기는 이 둘의 복합체라고 정의한다. 인간 지성의 기억과 상상력에 대해서는 이미 스코틀랜드의 18세기 경험론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이 정의한 바 있다. 흄은 우리의 기억은 과거에 있었던 경험을 있는 그대로, 경험의 내용과 강도와 순서대로 재생하는 지능의 활동으로 보았고, 상상력이라 함은 이미 가지고 있는 기억들의 내용과 순서나 강도를 재구성하는 인간의 지능 활동으로 보았다. 그러나 갓셜은 인간의 "기억"에 대해서 별로 믿지 않는 것 같다. 그에 의하면, 이야기는 기억의 재구성-즉, 상상력을 동원한 기억의 내용이나 강도, 그리고 순서까지도 재구성해서 "기억"이라고 내어 놓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이야기는 "픽션"(fiction)이고 상상력이라고 하는 인간 지능의 자의적인 "작품"이라는 것이다. 박일준 교수는 갓셜의 분석을 소개하면서 "...'스토리텔링'이 단지 과거 시대의 주요한 정보교환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스토리텔링이 갖는 근원적인 유대관계가 뿌리깊이 생물학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 인간은 '이야기하는 마음의 위대한 걸작'이며, [이야기]는 '우리가 만들어 낸 상상의 산물이다"(갓셜, 『스토리텔링 애니멀』, 213; 박일준, 발표자료, 14.) 그래서 "역사"와 이야기는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를 이야기의 한 종류로 보면, 역사 역시 과거에 일어났던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것이고 인간의 상상력이나 조작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과거 이야기는 완전한 허구는 아니지만 원본이 아니라 "각색"에 더 가깝고, 과거를 있는 그대로 되풀이 말하지 못(안)하는 것은 "의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야기가 이토록 의도적으로 "각색"되는 이유는 이야기를 더욱 흥미 있게, 혹은 실감나게 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겠다. 이야기를 각색하는 과정에서 이야기의 내용을 과장하기도 하고 축소하기도 하는 이야기의 '기법'이라고나 할까. 이야기 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서 이야기는 각색된다. 갓셜은 사람들이 자서전을 쓸 때 자신의 삶을 미화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훌륭한 삶을 살았다고 포장한다. 인간은 자기 이야기를 할 때 긍정적인 환상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우울증 환자"이다(갓셜, 같은 책, 212).

나는 일제하 소년기에 항일 목사 아버지가 좋아하고 권하는 김동인 등의 조선 역사 소설들을 즐겨 읽었다. 일제하 조선 초등학교에서는 조선사를 읽을 수도 배울 수도 없었지만, 나는 조선의 역사 교과서에서 우리 조선의 역사를 배운 것이 아니라, 역사소설-역사 이야기책으로 조선의 역사를 배웠다. 우리 조상들의 삶과 업적을 "찬양"하는 소설들이었기에, 나는 어려서부터 조선 왕조와 그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 긍지를 가지고 자랐던 것이다.

나의 이야기, 내 나라 내 민족의 이야기를 할 때는 그렇다 치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할 때는 어떨까 생각해 본다.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도 각색을 하는데, 남의 이야기를 할 때는 그 각색이 다양할 것이다. 말하는 사람의 기준에 따라 객관적이라고 하면서도 역시 주관적인 판단과 함께 이야기를 각색하고 사실과 기억을 재구성할 것이 틀림없다. 법정에서의 판결은 가장 엄밀한 객관적인 증거에 의해서 진행된다고 하지만, "오판"이 생기는 이유 역시 그 판결이 배심원이나 판사 검사 변호사들의 판단과 이야기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정당한 판결이란 의심할 수밖에 없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겪으면서 당사자들과 주변인들의 "기억"에 대해서, 그리고 "기억 없음"에 대해서 거의 일관적으로 우리는 믿지 않았다. 그들의 기억은 모두 거짓으로 인식되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믿은 사람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대통령 하야와 처벌을 요구하는 민중의 이야기와 태극기와 성조기를 휘날리며 탄핵 반대를 외치는 기독교인들이나 '박사모'의 이야기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난다. 그렇다면 누가 이야기를 믿을 수 있겠는가?

결국 이야기는 편파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이야기의 보편성을 말하고 인간은 모두 이야기로 생존한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다. 누가 누구 편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박근혜가 억울하다고 기자들 앞에서 국회의 탄핵소추안을 전면 부인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서 '박사모' 편에서는 정말 억울하다고 생각하고 "정의"가 실현되지 않고 있고 북한의 악의적 공작에 이용당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 "이야기"는 사실관계를 제쳐놓고 전개하는 "진영논리"와 "편 가르기"이다. 그래야 저들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이다. "보수" 진영이나 "수구세력" 편에 서면,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끝까지 깍듯이 모셔야 하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역사 국정교과서를 밀어 붙이는 것은 "옳고 바른" 역사를 가르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사실은 역사를 왜곡하고 자기 구미에 맞는, 그리고 일부 뉴 라이트 역사학자들의 "식민사관"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어서 학생들에게 주입시키자는 것이다. 그래야 일본제국주의에 뿌리를 둔 박정희 군사독재 체제가 정당화되고 미화되고 신화화되기 때문이다. 국정 역사교과서 논쟁은 "이야기 논쟁"인 것이다. 권력이 "이야기"를 독점하고 밀어 붙이겠다는 것이며, 이에 반대하는 학자들과 교사들은 "권력의 이야기"를 민중의 이야기로 "탈환"하겠다고 투쟁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믿기 때문에, 민중 편에 선다고 자부하고 싶다. 그러므로 나는 광장의 촛불을 드는 민중의 편에서 민중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내 이야기로 재구성한다. 그리고 갓셜이 말한 대로 "이 세계가 온전히 작동하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정의를 믿도록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갓셜, 165, 박일준, 13). 이것이 민중의 이야기꾼의 올바른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 권선징악의 윤리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

갓셜은 모든 이야기의 구조를 다음 "공식"으로 요약한다.

이야기 = 인물 + 어려움 + 탈출 시도 (갓셜, 79)

나는 요새 우리 텔레비전 드라마를 "막장"이건 아니건 가리지 않고 열심히 시청하는데, 이 공식은 정확한 것 같다. 등장인물로는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들이 등장하고 이들 사이의 갈등이 생기고 어려움이 생기고 싸우고 죽이고 미워하고 좋아하고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뺏고, 출생의 비밀이 드러나고 비밀이 탄로나고... 하다가 결국은 이 모든 곤경에서 탈출하고 문제가 해결되고 불행하면 불행한대로 "해피 엔딩"이면 그런대로 드라마의 이야기는 끝난다. 거의 비슷한 패턴으로 시작되고 진행되다가 끝난다.

종교적 이야기들은 "신화(神話)들로 신들의 이야기지만, 신화의 목적은 실제 일어난 일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것, '여럿'(pluibus)을 '하나'(unum)로 만드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목적이다"(갓셜, 156). 종교적 이야기, 신화가 공동체 통합의 기능이 있다면 역시 "사회 윤리적" 측면이 있으므로 이야기와 이야기꾼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도를 말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영국의 낭만파의 대표적 서정시인 셸리(Percy Bysshe Shelley, 1792-1822)는 "시인은 세계의 공인되지 않은 입법자(立法者)이다"라고 말했다(갓셜, 168).

그러므로 갓셜은 이야기의 "도덕성"을 강조하고 "권선징악"(勸善懲惡)"의 "패턴"(pattern)을 고수한다고 강조한다. 갓셜은 강조하기를 이야기는 시적 정의(poetic justice)를, 적어도 그에 대한 희망을 바탕으로 삼는다. 이것이 인간들의 도덕적 심성이고 정서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도덕과 윤리를 가르치지만, 또한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서 도덕적 심정적 욕구를 충족시킨다. 나쁜 놈이 잘되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도덕적 심성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톨스토이나 존 가드너와 같은 소설가에게도 있었다. 갓셜의 말을 빌리면, "소설은 점잖고 친사회적인 행동에 찬성하며, 배를 두드리고 불알을 덜렁거리는 악당의 탐욕에 반대하는 위치에 우리를 놓는다. 레프 톨스토이나 존 가드너 같은 소설가들은 소설이 본질상 깊이 도덕적이라고 주장했다"(갓셜, 165). 민중이 이야기를 좋아하고 즐기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야기가 도덕적일 뿐 아니라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돈과 권력을 가지고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못되게 사는 꼴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민중은 자기들이 만들어 낸 세상, 옳고 바른 정치, 민중을 억누르고 착취하지 않는 세상, 민중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희망한다. 그런 꿈과 희망이 담긴 이야기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의 이야기의 도덕적 입법대로 세상은 돌아가지 않는다. 권선징악의 이야기는 현실과 다르다. 이야기 속에서도 착한 사람들이 억울하게 당하고 못 살고 감옥에 가고, 악한 자들이 득세하고 떵떵거리며 사는 것을 본다. 그리고 현실세계 속에서는 유전무죄, 무전유죄, 도대체 정의라고는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이야기와 현실은 다른 것이라는 것을 실감하면, 좌절되거나, 도덕과 윤리와 정치에 대한 냉소주의가 팽배하게 된다. 그러나 민중은 분노한다.

그러므로 민중의 이야기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갓셜의 통찰이다. 이 힘은 민중의 박탈감에서 오는 분노의 힘이다. 박근혜 퇴진과 하야와 탄핵을 요구하는 광장의 촛불은 민중의 이야기가 권력의 이야기와 다르고 권력의 이야기는 거짓말뿐이라고 하는 박탈감과 배신감에서 터져 나오는 분노의 높은 파도이다. 민중의 이야기는 그래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혁명적 힘을 분출할 수 있다. 이 혁명적 힘은 행동으로 터져 나간다.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국회로 하여금 대통령을 그 권좌에서 내려오게 하고 새 정권을 창출한다. 2017년 우리는 이 역사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역사가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가 새 역사를 만든다. 민중의 이야기에는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 되게 하는 꿈이 있고 미래에 대한 정치적 상상력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야기꾼

예수는 민중의 이야기꾼이었다. 4복음서는 예수의 이야기, 예수가 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예수는 유태교 경전을 인용하는 옛날이야기를 위시해서 수많은 비유를 들어가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예수는 지옥과 천당 이야기를 꽤 많이 했다. 산과 들에 예수의 이야기를 들으러 남자들 숫자만 5천명이나 운집했다.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계산하면 남자들의 수의 배는 계산해야 하니까 모두 1만5천 명은 됐을 것이다. 그들은 날이 저물어가는 줄도 모르고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예수의 이야기에 몰입하였다.

4복음서는 모두 예수의 이야기, 예수가 그 짧은 인생을 살면서 한 삶과 행동과 행적의 이야기이다. 예수의 탄생 이야기, 예수의 가르침과 기사와 이적들, 예수가 제자들에게 한 말들, 예수가 제사장과 로마 총독 빌라도의 재판을 받고 로마제국의 정치범이 매달리는 십자가에 처형되는 이야기, 그리고 부활한 이야기. 그 많은 이야기들은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유태 민중들에게 한 이야기들이고, 고난당하는 유태 민중 자신들의 이야기, 그들의 현실, 그들의 꿈과 그들이 그리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였다. 예수의 이야기는 민중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아직도 예수의 이야기는 우리 민중의 이야기이다. 예수는 유태 민중이었고, 오늘도 예수는 우리 민중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야기꾼이었고, 민중은 이야기를 만들고 퍼뜨린다. 그 이야기는 "유언비어," 하늘나라의 유언비어일 수 있다(현영학). 그래서 예수는 민중이고, 이야기를 만들고 말하는 민중은 바로 예수이다.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이다. 안병무는 이 역사를 알고 있었다.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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