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 40 "종교적 인간에서 신앙하는 인간으로"

정재현의 신앙성찰

2. 종교간 만남의 허구성과 그 극복을 위하여(6)

jungjaehyun
(Photo : ⓒ베리타스 DB)
▲정재현 연세대 교수(종교철학)

철저히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개별적인 신앙인들로서 서로 다른 다름을 그 다름과 다른 자기의 같음으로 환원시키지 않고 서로 다른 다름들끼리 공존하는 겸허함을 배우기 위해서는 먼저 본 연구의 문제의식인 '종교간 만남의 허구성'이라는 것에 대해 정직하고도 진솔하게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원론적인 반성에서 시작함은 당연합니다. 종교간 만남이라는 과제가 사실상 종교인들 사이의 만남이라고 할 때 인간과 종교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종교, 그리고 종교들의 관계에 대한 논의에서 인간 자체에 대해서 뿐 아니라 인간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숙고가 결여됨으로써 결국 종교들의 만남이 인간의 현실과는 무관한 허상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간의 실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점이 진솔하게 직시되지 않으면 내내 공허한 종교간 만남의 논의가 될 것이며 인간은 종교라는 허울 안에 숨어서 위선을 저지르거나 종교라는 포장 때문에 인간의 현실에 이르지 못하는 공허한 만남의 틀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작금의 현실은 이미 이에 대한 좋은 증거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좀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인간과 종교의 관계 및 이에 깔려 있는 욕망으로 인한 관계의 이중성을 살펴야 합니다. 즉, 인간에게서 종교란 자기보존본능이라는 원초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문화체계로 태동했으면서도 동시에 반인간적 억압과 비인간적 고통의 원천으로 작용하는 야누스의 얼굴을 지니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양면성은 사실상 종교가 그 태동 동기인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이중적인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죽음으로 정점을 이루는 삶의 온갖 불안과 절망, 고통 등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욕망에서 종교적 초월성이 희구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종교들이 대체로 인간에게 욕망을 버림으로써 해방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만큼 인간의 욕망에 대해 종교는 이중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종교간 만남에 관한 논의가 이러한 점을 숙고하지 않는다면 출발부터 비현실적인 착각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이제 인간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이와 같은 원론적인 반성을 다진 후에는 이를 토대로 종교간 만남에 관한 논의를 살피는 데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언급되었다시피 종교간 만남은 서구 기독교신학계에서 '비기독교적 종교들(non-Christian religions)'이라고 부른 '다른 종교들(other religions)'을 만나게 되면서 촉발된 반성적 과제에서 시작되었던 만큼 이에 대한 검토는 우리의 연구를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록 서구 기독교신학계가 종교간 만남에 관한 논의를 통해 종교신학을 엮어 내면서도 기독교의 범주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남의 유형분류에 관한 논의 등 이들에 의해 개진된 연구 성과는 종교간 만남이라는 과제가 오히려 그들보다 더욱 절실한 한국 사회에 대해서 지니는 뜻은 결코 지나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관계유형론을 중심으로 한 서구의 논의를 체계적으로 살피는 것은 우리의 종교신학방법을 위한 초석이 될 것입니다. 물론 종교간 만남의 허구성에 대한 비판은 바로 여기서부터 적용되어야 하니 소위 배타주의-포괄주의-다원주의로 분류되는 일반적인 유형론이 지니는 허상이 파헤쳐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앞서 지적한대로 사실상 종교간 관계유형론은 이를 이루고 있는 입장들의 첨예한 표면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종교'라는 역사적 허상을 공통적인 근거로 지니고 있어서 이미 그 자체로서 허구적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러한 검토를 토대로 나아가 한국사회에서의 종교간 만남에 관한 논의와 실상을 비판적으로 분석해야 합니다. 먼저 서구 기독교신학계가 주도적으로 전개해 왔던 종교간 만남에 관한 논의를 한국기독교와 신학계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펼쳐내어 왔는가를 되짚어보는 일은 한국 사회에서의 주체적 수용과 비판적 개진을 위해서도 마땅히 거쳐야 할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후에는 이미 다종교현상의 유구한 역사를 체득적으로 경험해 온 한국 사회에서 종교간 만남이라는 과제에 대해 오히려 한 수를 둘 수 있을 만한 통찰이 축적되어 있을 가능성에 대해 새삼스러이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서구의 논의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고 답습하며 심지어 대리전적인 양상까지 벌였었던 한국 사회의 종교계, 특히 기독교계의 몰역사적 천박성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자성적인 분석과 비판은 우선 한국 사회에서 벌어졌던 학문적인 논의에 대해서, 그리고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만남의 현장에 대한 조사와 분석을 통해서 수행되어야 할 것이니 말입니다.

이 맥락에서 잠시 덧붙인다면, 한국 사회 안에서 시도되었던 종교간 만남에 대한 학문적 논의의 경우 진정한 의미에서 사실상 '만남'이 아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독교 안에서도 이미 전통문화와의 자연스러운 토착화 단계를 거친 가톨릭교계보다도 전통에 대한 문화적 단절까지도 불사했던 초기선교역사를 지닌 개신교회가 그 과오를 자인해서인지 종교간 만남에 대해 오히려 적극적인 상황임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런데 주로 개신교 신학자들에 의해 전개되어온 종교간 만남의 논의는 다른 종교들에 대해 적당히 훑어보면서 추려낸 자신의 피상적인 이해를 기독교에 대한 자신의 이해와 작위적으로 연관지으려는 시도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불타적 그리스도,' '공자적 그리스도,' '노자적 그리스도' 등을 들 수 있는데(여기서 이에 해당하는 사례들을 실명과 함께 들추어내는 일은 자제하도록 하겠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이 방면을 뒤지기 시작하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작위적인 합성을 만남의 목표로 상정하는 것은 만남이 진정하기 위해 존중되어야 할 다름을 말살하는 책동일 뿐, 여전히 긴장으로 견디어 내어야 하는 다름과의 만남에서 이를 수 있었던 귀결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말하자면 만남이 같음 또는 비슷함을 발견하고 확인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다름에 의한 긴장을 배제하려는 자기동일화의 논리에 지배된다는 것은 그것이 허구적이라는 좋은 증거일 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만남을 지향하면서도 비의도적이지만 오히려 만남을 방해하는 이와 같은 혼합주의적인 논의의 허상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비판이 따라야 할 것입니다.

다른 한편, 종교간 만남의 현장은 어떠한가요? 이에 대해서도 여전히 같은 맥락에서의 비판이 적용되어야 하리라고 판단됩니다. 상세한 논의는 현장조사를 거친 사례분석을 통해서 전개되어야 하겠으나 그 만남의 실상이 종교 본질적인 것이기보다는 종교 외적 공동선을 위한 과제의 성격을 지닌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이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요구되는 것 또한 사실이니 말입니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서 종교간 만남의 본격적인 현장 사례를 수집하여 분석하고, 필요한 경우 이에 관여했던 사람들에 대한 직접적인 심층면접과 설문조사 등을 통해서 만남의 현장에서의 '허구성'에 대해서도 실증적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물론 종교간 만남이라는 것이 다원주의의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입장을 취하는 경우에 대해서도 차별 없이 고려되도록 하되 이를 위해 사회학적-심리학적 분석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함은 물론이구요.

이러한 분석과 비판이 예비적인 토대작업이라면 이제는 '종교간 만남의 허구성'에 대한 철학적 시비(?)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 논의에서는 종교간 관계구성 논의가 인간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통찰이 결여되거나 망각됨으로써 인간과 따로 돌아가는 종교 자체의 논리라는 허상을 좇아가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해야 합니다. 이로써 종교간 만남이란 서로 다른 이름들의 만남일 뿐 종교들의 만남도 아니고 인간들의 만남은 더더욱 아니었다는 현실진단에 대한 인간학적 성찰을 포함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성찰을 거쳐 종교간 만남의 본래적 취지를 참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종교'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단위인 '인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이로써 만남의 '허구성'을 극복하기 위한 실마리를 더듬게 될 터인즉, 이른 바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으로부터 '신앙하는 인간(homo fidei)'으로의 이행을 촉구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Wilfred Cantwell Smith, The Meaning and End of Religion [New York: Macmillan, 1962]; Kuk-Won Bae, Homo Fidei: A Critical Understanding of Faith in the Writings of Wilfred Cantwell Smith and Its Implications of the Study of Religion, Toronto Studies in Religion [New York: Lang, 2003], Vol. 26, Ch. 5. 참고). 여기서 이행이란 정태화한 신념체계를 가리키는 명사로서의 '종교(religio)'로부터 삶과의 동치를 꿈꾸는 역동성을 머금은 동사로서의 '신앙(fides)'으로 대체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같음으로 묶어내려는 명사적 성향을 지닌 종교보다는 다름이 숨쉬고 나아가 함께 어우러지면서도 서로 긴장을 자아내기도 하는 동사로서의 신앙이 만남을 위한 전제적인 조건으로 더욱 적절하리라는 현대 종교철학적 통찰에 입각한 제안입니다. 또한 종교가 성(聖)과 속(俗) 사이의 이분법적 분리를 전제로 하는 객관적인 접근을 위한 개념이라면 막상 그러한 종교에 속하여 구체적인 신앙을 행하는 인간에 대해서는 여전히 거리를 두는 입장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러한 이분법적 분리를 넘어서는 포괄적이고 통전적인 삶의 차원에서 신앙이라는 범주로 눈을 돌리자는 것을 강조하는 뜻을 지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종교로부터 신앙으로 범주를 개별화하자고 해서 신앙인의 개체성이 출발점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무릇 인간이라는 것이 이미 그 자체로서 관계적인 존재이고 관계적인 만큼 개체적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개체성과 관계성은 서로 치환가능한 보편성과 실체성에 대해 각각 상대적인 개념들이지만 이 둘 사이는 긴장을 유지한 채로 얽히는 것이어서 바로 이 역학을 주시하는 일이 절실히 요청됩니다. 결국 신앙으로의 범주개별화는 인간의 개체성과 관계성 사이의 역동적 긴장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되뇌이지만, 같음과 다름의 경계설정 불가성은 바로 이를 가리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남이나 대화가 지향할 바로서 공통적 기반에 대한 향수를 여전히 떨칠 수 없다면 그러한 기반은 신앙하는 인간개체를 이루는 관계성에서 찾아져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이루는 같음과 자기 안에 있는 다름 사이의 긴장에 대한 진솔한 통찰에서 종교를 봄으로써만 자기의 신앙과 타자의 신앙이 엮어내는 긴장을 적절하게 대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여 자기 안의 다름을 보지 못한 채 만남을 통해 공통적 기반을 향하려 한다면 자기와 동일시하는 같음으로의 흡수에 머무르게 될 뿐이며, 이는 결국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되는 '하나'라는 허상을 붙잡으려는 집요한 자기중심적 욕망의 소치일 뿐이니 말입니다. 사실상 만남이 추구한다는 공통적 기반이란 타자 안에서 자기의 같음을 확인하려는 것이며, 자기확인과 확장을 꾀하는 대화가 진정할 수 있겠는가는 물음에 재론의 여지가 없다는 점은 이를 명백히 해 준다 할 수 있습니다.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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