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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책 소비량은 늘리고 냄비근성은 줄이는 방법

leedonghyun
(Photo : ⓒ베리타스 DB)
▲성추문으로 논란을 빚은 라이즈업무브먼트 이동현 전 대표가 해당 노회로부터 면직 처분을 당했다. 이에 앞서 이동현 전 대표는 스스로 목사직을 내려놓는 다고 밝힌 바 있다.

필자는 이전에 이동현 목사 사건에 대한 글을 기고하면서 그 사건에서 그 주어의 이름을 지우고 중성적으로 고민해보자고 주장한 바 있다. 그때 주장의 근거는 우리도 늘 그러한 가십거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에 있었다. 물론 우리 모두가 성범죄자가 쉽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언제든 성범죄자가 될 수 있으니 성범죄자를 욕하는 것을 조심하자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필자는 당연히 우리를 감시하는 그 시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감시의 시선이 우리 자신의 내면으로 파고들어 서로를 감시하는 주체가 되어 가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우리는 이미 일반적으로 구조화되어서 그 일반성에 벗어난 것들을 견디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그 감시 내용이 되는 구조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다.

필자는 필자 자신이 얼마나 구조화되어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분명 필자의 행동들을 반성해볼 때 필자는 이미 이 사회체계에 길들여진 종이다.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광인들을 보면 불쾌한 기분이 들고, 일반적으로 반복되던 삶의 패턴에 새로운 자극이 들어오면 긴장한다. 이러한 긴장은 모든 생명체에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필자가 생각하는 이 일반적인 반복에 필자 스스로 '정상적이다'이라는 기호를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새로운 자극에는 언제나 '비정상적이다'라고 기호를 부여한다. 필자는 이 정체모를 '정상'-'비정상'이라는 기호에 나 스스로가 놀아나고 있다는 섬뜩한 느낌을 반성의 결과로 얻게 된다.

이동현 목사의 사건은 '정상'-'비정상'의 문제가 아니라 '죄'의 문제로 확장된 케이스다. 하지만 이 죄라는 것이 성립할 수 있는 것도 묻고 따지자면 쉽지 않다. 오죽하면 고대 근동의 법들이 신들로부터 수여되는 것으로 묘사되었을까? 그만큼 법의 정당성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플라톤의 <국가> 2권에서 글라우콘은 만일 우리에게 기게스의 반지가 있어서 타인이 우리를 볼 수 없게 된다면 우리는 사회에서 죄라고 규정하는 온갖 행위들을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당신은 기게스의 반지가 있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질문의 핵심은 우리는 이미 각자의 쾌락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그것은 지극히 자연적인 상태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발적으로는 스스로의 쾌락을 쉽게 포기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발적으로 우리의 쾌락을 포기하지 않는데도 우리의 쾌락을 제안하는 그 법의 구속력은 어디서 오는가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권력자, 즉 힘이 있는 사람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럼 우리는 다시 물을 수 있다. 그 권력자는 자신의 쾌락을 포기할 수 있는가? 그도 사람인데? 그럼 그 법이란 것은 사실 힘 있는 사람이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사용하는 도구인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이전에 말했듯이 법은 사람이 아닌 스스로의 쾌락을 조절할 수 있는 신에게서 온다는 논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우리도 잘 알듯이 플라톤은 인간은 지성이 있기에 올바름을 이해할 수 있고, 급기야 올바름 자체인 올바름의 이데아를 인간은 직관할 수 있기에 법의 구속력이 사회적으로 통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후의 논의들이 더 이상 플라톤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고, 이 법적 구속력에 관한 문제에 대해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더 많은 텍스트들을 소화해야만 한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하루아침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법적 구속력에 관한 문제만 해도 너무 방대하다.

필자는 이동현 목사의 성범죄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죄와 법적 구속력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플라톤으로, 그리고 플라톤 이후의 법에 대한 견해를 언급했다. 물론 플라톤 이후에 대한 논의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내용도 제시하지 않았다. 바로 이것이 필자가 이전 글에서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동현 목사의 케이스는 그저 케이스일 뿐이다. 망망한 대지에 볼록 솟아오른 뒷산이다. 우리가 지구 자체를 생각해보면 그것은 문제도 아니다. 우리는 이동현 문제로 시작했지만 이야기를 막상 시작해보니 본론에서 이동현 문제는 끼어들 틈도 없었다. 우리가 고민해야만 하는 본질적인 문제들은 언제나 겉으로 들어나는 하나의 특수한 케이스가 아니라 그 심연에 깔려 있는 그 무엇이다. 우리가 찾아 나서야만 하고, 고민해야만 하는 바가 바로 거기에 있다.

학문은 원리를 연구한다. 수많은 케이스들에 내포된 공통치를 추적한다. 그리고 그것을 간결하게 법칙화 한다. 법칙은 간결하지만 법칙화 하는 것에는 엄청난 수고가 뒤따른다. 간단하게 몇몇 케이스에 광분하는 것으로 우리는 결코 법칙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런데 누군가 이 시점에서 그런 법칙은 어디에 있느냐고 눈치 없이 물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질문은 진정 핵심을 찌른다. 필자가 묻고 싶은 말이 바로 그 말이다. 우리는 사실 학문에서 추구하는 그런 법칙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당신은 이동현 케이스를 죄라고 그리도 쉽게 규정하느냔 말이다. 그러면서 왜 광분하냐는 말이다. 그것이 죄여야만 한다는 법칙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그것을 마구잡이로 죄라고 규정하며 왜 흥분하냐는 말이다. 결국 이동현 목사를 죄라고 규정하는 것의 일차적 근거는 본인의 신념이며 이차적으로는 대중의 동의이고, 그것을 확증해주는 것이 우리 사회에 이미 구속력을 발휘하는 법의 구조적 질서일 뿐인데도 말이다.

우리는 앞에서 우리가 한 번도 고민해보지 않았지만 이미 나를 구조화 하는 것들에 대해 간략히 이야기했다. 그 중 하나는 우리가 서로를 죄인이라고 규정하게끔 하는 법적 구속력의 구조였고, 그 법의 구속력의 출처를 따져보니 그것을 그저 신에게 돌릴 것이 아니라면 법적 구속력은 참으로 근거 미상의 구속력이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법의 구속력의 출처에 관한 것은 참으로 막막한 문제였다. 그러니 이것이 이동현 목사 개인의 문제이며 이동현 목사 욕하고 끝날 문제인가? 술 마시며 주저리주저리 안주꺼리 삼을 성질의 것인가?

필자는 이전의 글을 대한민국의 술 소비량을 책 소비량이 앞질렀음 하는 바람으로 끝맺은 바가 있다. 그렇다. 우리는 술 마시며 케이스들을 잡고 물어지기만 하고 있다. 정말 그렇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것에 약하다. 여러 책을 읽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들어보고 다시 고민하고, 판단은 나중으로 밀어두는 것에 정말 약하다. 그러니 우리는 냄비근성이 있다고 스스로 자각하는 것이 아닌가? 어떠한 케이스도 우리 기억 속에서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케이스는 케이스일 뿐이고 하나의 파편일 뿐이다. 수많은 케이스들이 쌓여서 그 케이스들을 반성하여 그 원리가 추론, 혹은 직관되었을 때 우리는 그때서야 그 케이스에 대해서 나름의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판단력'을 키우는 것에는 무관심하고 나의 신념과 대중의 동의와 사회구조의 확증에 힘입어 괜시리 분노하기에 힘쓴다. 그리고 돌을 들기에 급급하다. 마치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는 양. 그래서 결론은 다음과 같다.

하나의 사건이 터졌을 때 한 사람의 특수한 행위와 그 동기에 집착하기보다는 더 큰 구조 내에서 그것을 3인칭적인 사건으로도 한 번 봐보자. 필자는 그럴 때 생각보다 문제가 더 복잡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더 복잡한 만큼 그리 쉽게 그 문제에서 손을 떼지는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100명 중 90명은 중간에 나가떨어진다고 하더라도 10명은 끝까지 그 문제의 핵심을 파보려고 노력할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대부분 그런 사람들은 학자들일 것이며 그래서 학자는 사회에서 존중을 받아야만 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다 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기에 각자가 더 깊게 고민하는 문제들이 있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 사회 전체가 그 본질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을 때에 우리는 각자가 더 깊게 고민하지 못한 다른 수많은 분야들의 전문가들의 책을 읽게 될 것이다. 그럼 술 마시고 술김에 사람 씹을 시간이 확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냄비 속에서 부글부글 끓을 그 분노의 감정들도 미지근해질 것이다. 그럼 책 소비량이 술 소비량을 쫓아갈 수 있을 것이며 우리의 고질적인 냄비근성도 조금은 개선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회가 되면 우리 모두에게 유익할 것이다.

장효진 객원 anasynthetics@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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