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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욕심을 버릴 수 있다면(야고보서 1:14-15)

2014년 11월 23일 높은뜻연합선교회 주일예배 설교자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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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지유석 기자)
▲김동호 목사

성경본문

약 1:14-15.

설교문

사람은 누구나 다 욕심이 있습니다. 세상에 욕심이 없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심은 대개 정욕, 명예욕, 물욕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은 가지고 있는 욕심이 채워질 때 행복함을 느낍니다. 욕심이 채워지지 않을 때 사람들은 불행을 느낍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욕심이 채워짐으로 느끼는 행복이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욕심이 채워지면 만족하고 행복한데 얼마 안가서 금방 그 행복감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또 행복감을 느끼고 싶어서 전보다 더 큰 욕심을 부립니다. 그리고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그래서 또 그 욕심이 채워지면 행복해 합니다. 그리고 또 금방 그 행복감을 상실합니다. 그러면 또 더 큰 욕심을 부립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반복을 무한히 계속합니다. 마치 다람쥐가 채바퀴 돌듯 합니다.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에게 '네가 주는 물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물은 마실 때 뿐 조금 있으면 또 갈증을 느낍니다. 세상 욕심과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셔도, 마셔도 또 다시 갈한 불완전한 시원함입니다.

솔로몬은 그것을 전도서에서 '모든 강물은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세상 욕심과 그것이 주는 만족과 행복을 바다로 흐르는 강물에 비유한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강물이 쉬지 않고 흘러들어와도 바다는 채워지지 않습니다. 욕심과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60년 대 우리나라 국민소득은 100불 미만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국민소득은 27,000불이 좀 넘습니다. 불과 반세기만에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300배 이상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집에 전화가 있으면 부자였었고, 텔레비젼과 냉장고가 있으면 부자 소리를 들었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집을 샀었는데 그 때 집값이 약 50만 원 정도였습니다. 지금은 극빈자라고 할만한 집에도 냉장고와 텔레비젼은 거의 다 있습니다. 당연히 전화도 있습니다.

정부가 매달 생활비를 지원해 주는 가정에도 전화는 있습니다. 그런 가정에는 나라가 전화를 나줍니다. 그리고 한 달에 어느 정도의 전화요금도 내줍니다. 그렇지 않으면 동회가 저들을 돌보고 연락하는데 돈이 더 들기 때문입니다.(꽤 오래 전에부터 이런 제도가 있었는데 아마 지금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세상에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갑자기 그렇게 부자가 된 나라는 세상에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전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대개 불만입니다. 경제가 발전한 속도보다 욕심이 발전한 속도가 더 빠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는 욕심을 채운다고 행복해 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쉽게 배우지 못합니다. 수 백배에서 천 배 이상 부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더 큰 욕심을 가지고 그것을 채우려고 동분서주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욕심의 문제는 끝이 없다는것만이 아닙니다. 욕심 자체가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끝없는 욕심은 만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족함이 행복함인데 늘 불만을 느끼니 행복해질 틈이 없는 것입니다. 욕심은 우리에게 시기와 불평과 원망과 다툼과 끝없는 경쟁이 주는 피곤함을 가져다 줍니다. 그리고 사망의 원인이 되는 죄까지 짓게 합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욕심이 잉태한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행복은 욕심을 채우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다시말해서 욕심을 비우는데 있습니다. 행복해 지려면 욕심을 채우려 하지 말고, 반대로 욕심을 버리려고 해야합니다. 욕심을 버린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버릴 수만 있다면 욕심이 가져다 주는 절대적인 피해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욕심은 참 나를 불행하게 하고 초라하게 합니다. 욕심이 나에게 가져다 주는 불행함과 초라함을 한 번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째, 시기심입니다.

이웃이 밭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게도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저는 제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내가 너무 초라해 보입니다. 이웃을 밭을 사면 배가 아픈 시기심은 욕심 때문에 생기는 마음입니다. 욕심이 없다면 시기심도 없을 것입니다.

둘째, 남의 불행을 은근히 기뻐함입니다.

시기심보다 더 못 마땅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남의 불행을 은근히 좋아하고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세상은 제로섬 게임과 같습니다. 우리의 욕심을 채울 수 있는 돈과 명예가 한정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여 나누어 갖는 것입니다. 남이 더 가지면 당연히 내 몫이 줄어들게 되고, 남이 실패하여 잃어 버리게 되면 자연스럽게 나에게 자연히 더 기회가 오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실패와 불행을 본능적으로 좋아하고 기뻐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또한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이 없다면 그런 창피하고 수치스러운 마음을 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셋째, 남을 짓밟음입니다.

욕심이 많아지면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것을 넘어서 아예 남을 불행하게 만들려고 남을 짓밟게 됩니다. 그것은 참 악한 일입니다. 그리고 참 못난 일입니다. 저는 제 마음 속에 그런 본능이 있는것이 못마땅합니다. 창피합니다. 수치스럽습니다.

넷째, 비겁함입니다.

욕심이 크면 클 수록 사람들은 비겁해 집니다. 욕심내는 것을 잃어 버릴까봐 치사해지고 비겁해집니다. 욕심이 없다면 사람들은 훨씬 더 당당해지고 근사해 질 겁니다.

다섯 째, 잘난 채 함입니다.

욕심이 채워지면 사람은 순간적으로 교만해집니다. 그것을 과시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경쟁에서 뒤 떨어진 사람들을 은근히 깔보고 무시합니다. 그건 참 유치한 생각과 행동입니다. 욕심이 없다면 무엇을 얻고 달성하여도 그렇게 잘난 척 하지는 않을 겁니다. 함부로 남을 깔보거나 건방져지 않을 겁니다. 욕심은 사람을 참 못나게 합니다.

여섯 째, 거짓됨과 불의함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반드시 죄를 낳습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욕심이 커지면 커질 수록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됩니다.

일곱 째, 어리석어 짐입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자연히 어리석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말에 '욕심에 눈이 먼다'는 말이 있습니다. 욕심은 우리에게서 지혜를 빼앗아 갑니다. 분별력을 빼앗아 갑니다. 눈을 어둡게 합니다. 당연히 인생의 게임에서 패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사물의 이치를 알고, 인생의 길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후배들과 후손들에게 인생을 가르칠 수 있는 지혜로운 스승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욕심이 있으면 그 근사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어리석어 지기 때문입니다.

여덟 째, 불평과 불만이 가득함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때문에 300배의 욕심을 채워도, 1,000배의 욕심을 채워도 만족은 없습니다. 늘 불만을 느낍니다.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살아야만 합니다. 불평과 불만은 곧 불행의 다른 이름입니다.

아홉 째, 의로운 일에 욕심 없음입니다.

쓸데 없는 일에 욕심을 부리게 되면 정작 욕심을 부려야 할 근사한 일에 대한 욕심이 없어집니다. 가치있고, 훌륭하고, 아름답고, 근사한 일에 대한 욕심이 없어집니다. 그것이 무엇보다도 큰 욕심의 폐헤입니다.

욕심을 버리고 싶습니다. 욕심에서부터 벗어나고 싶습니다.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습니다. 그래서 장말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을 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유치하고, 초라하고, 악한 마음과 삶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습니다. 훌륭하고 아름답고 의미있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이 땅에 살아도, 혹 가난해도,, 혹 세상적으로 실패해도, 그것과 상관없이 언제나 하나님 나라를 사는 복을 받고 싶습니다.

어떻게하면 그 지긋지긋한 욕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욕심을 버릴 수 있을까요?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3:5)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남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하기 이전에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우리는 타락하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타락하기 이전의 삶은 한 마디로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 욕심이 없었던 때입니다.

예수는 거듭나기 위하여 믿는 것입니다. 예수는 세상의 때묻은 욕심을 버리기 위하여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는 예수를 세상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기독신앙이 아니라 미신적인 신앙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을 더 드리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그것은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잘못하면 말장난하는 것 같이 들릴 수 있지만 매우 중요한 말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돈도 벌지 않고, 성공과 출세를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벼개하고 누워지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욕심을 버리는 것은 어쩌면 조금 더 쉬울는지 모릅니다.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돈과 명예를 목적으로 삼지 않고 수단으로 삼는 것입니다. 욕심이 문제이지 돈이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욕심이 문제이지 명예가 문제는 아닙니다. 돈과 명예는 가치 중립적인 것입니다. 그 자체는 악한 것도 아니고 선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누구의 손에 달려 있는가에 따라 돈은 좋은 것이 될 수도 있고, 나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명예는 좋은 것이 될 수도 있고 나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거듭나기 전의 바울에게 있던 로마시민권은 다른 사람을 착취하고 지배하고 억누르는데 쓰여질 수 있는 악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거듭한 후의 바울에게 로마시민권은 로마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바울에게 가져다 준 좋은 수단과 도구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시민권을 이용해 로마 황제에게 항소를 할 수 있었고,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압송을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바울은 로마로 갈 수 있었고 결국 로마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무조건 세상적인 것을 죄악시하여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것들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한 수단으로 바꾼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욕심을 버린다는 핑계로 나태해지고 게을러져서는 안 됩니다. 무조건 세상적인 경쟁을 포기하여서는 안 됩니다. 돈도 벌고, 성공도 하고, 출세도 하지만 그것을 통하여 개인적인 만족과 행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진정으로 거듭난 삶을 살 수 있게 되고, 하나님 나라의 행복을 느끼고 누리며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속된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 주시는 참 기쁨과 보람과 만족을 누리며 이 땅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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