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예따람 공동체] “본(本)”

2015년 3월 1일 주일예배 설교자 강석찬 목사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한복음 13:14-15)  

1.  
부끄러운 말씀일까요? 아니면, 죄송스러운 말씀일까요? 전도사 시절부터 지난 주일까지 매 주일 설교를 해 온 목사입니다. 40년 가까이 설교를 안 한 주일이 거의 없었죠. 교회현장을 떠나서도 가정예배로 설교를 계속하였어요. 그런데 “이런 날(주일)도 있구나”하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저 자신도 무척 놀라기도 했습니다. 오늘 주일 아침까지, 정확하게 오늘 8시까지 설교 주제, 본문, 제목, 그 어떤 것도 결정하지 못했어요. 9시30분에는 의자에서 일어서야 합니다. 1시간 30분이 남았어요. 1주일 내 방황했어요. 성령을 주제로 잡나? 3.1절을 주제로 하나? 주제를 잡는 일부터 안 되어서 조바심과 안달로 지내면서도 정리되지 않는 생각 때문에 힘들었어요. 설교로 밥을 먹는 목사가 주일 예배 시간이 코앞인데도 아무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의 심정이 어떨지 상상이 되나요? 아주 힘들었어요. 기도했고, 성경을 읽었고, 설교를 위해 책을 뒤적이기도 하고, 여러 자료들을 다시 보기도 했지만, 결국 아무런 결정을 할 수 없었어요. 성령의 도움을 간구했지만 응답이 없었어요. 정말 큰일이구나 했어요.   
평소 같으면, 주일이 지난 직후, 했던 설교는 말갛게 잊어버렸죠. 비운 마음에 다음 주일 설교 본문과 주제가 떠오르곤 했어요. 어떤 경우에는 몇 달 전에 설교의 방향을 정해놓고 숙고하고 묵상하기도 했었습니다. 3.1절 절기같이 고정된 날은 미리미리 준비해두곤 했었답니다. 그런데 정말 아무 것도 되질 않았어요. 머릿속이 하얗게 된,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된 주일은 전도사 시절부터 설교를 거의 한 주일도 거르지 않았던 내게는 처음입니다. 
물론 이 시간 동안 설교를 쓰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쩌면 평소보다도 훨씬 더 많은 설교를 작성했다가는 지우고, 다시 쓰고 버리고, 또 쥐어짜고 구성했다가는 포기하고 했으나, 결국 노트에 원고가 옮겨진 것은 주일 아침 8시까지 아무 것도 없었어요. 미칠 것 같다고 할까요? 한 마디로 표현하여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공포였답니다.   
오랜 설교 경험으로 생각해보면, 설교에 공을 들이어 주석을 살피고, 문장도 서너 번을 다듬어, 스스로 논리적으로 “됐다”라고 안도하면서 “잘 된 설교야”라고 믿었던 설교에는 교인들이 “은혜 받았다”는 반응이 없어 실망이 되고, 바쁜 목회 일정에 쫓겨 준비가 덜 된 채 강단에 올라, 그 시간에 성령께서 주시는 대로 한 설교가 “은혜가 되었다”는 교인들의 반응을 보이는 경우를 많이 경험했기에 피할 이유로 삼아보려고도 헸지요. 그래도 그때에는 준비가 덜 되었다고 하더라도 설교의 틀, 내용, 예화, 본문해석 등이 나름 준비되어 요점으로 한 시간 이상을 설교할 수도 있었죠. 
오늘은 이것조차도 꿰어지지 않았어요. 이렇게 꽉 막힐 수가 있을까! 그런데 시계는 째깍째깍 돌아갑니다. 힐끔 쳐다 본 시계가 8시를 넘어섭니다.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시간입니다. 초조한 마음을 다스리려 쓴 커피 한 모금 마셨습니다.  
2.
이제 더 이상 물러설 시간이 없습니다. 낭떠러지 끝까지 밀려서 결정한 것이, 요즘 스스로에게 묻고 묻는 문제를 설교주제로 정하기로 한 것입니다. “본(本)”이라는 단어입니다. 목사인 나에게 목회는 무엇이고, 목사인 내게 목사는 무엇인가? 목회 현장에 있을 때에는 깊이 있게 생각할 여유 없이 내밀려서 진득하게 고민해보지 못한 본질에 대한 질문입니다. 비교적 시간의 여유도 있고, 인생의 경험도 조금 쌓인 요즘 지난날을 반추(反芻)하면서 목회자로 살아온 자신이 무엇을 한 것인지 묻고 있는데, 이 말씀을 설교 주제로 삼기로 했습니다.  
어쩌면, 오늘 설교는 지난주일 설교의 속편(續編)일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질문했었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교회다운가? 신도들은 신도다운가? 목사는 목사다운가? 우리가 ‘다움’을 상실했을 때, 그 이름을 그냥 가지고 있는 것은 기만이요 허위입니다. 목사답지 않은데 목사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으면 속이는 것이죠. 그래서 ‘다움’을 화두로 삼아 자신의 본질을 살피려 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왜 급작스럽게 쇠퇴기로 들어섰을까요? ‘다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다움’을 회복할 때, 우리로 말미암아 한국교회도 살아나고 교회가 살아날 때, 대한민국도 살아나며 희망이 있게 될 것이라는 판단이었습니다.  
마침 오늘이 기미년,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3.1절 96주년의 날입니다. 푸른 눈의 항일운동가로 불렸던 미국 선교사 윌리엄 린튼(한국명 인돈, 1891-1960)이 1919년 5월 미국 <애틀랜타 저널>에 당시 상황을 아래와 같이 기고했습니다. 
“3월1일 전국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한 인파가 쏟아져 나왔다. 폭력이나 무질서가 없었다. 일본정부가 이 봉기를 억누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참가자들을 체포하는 것이었다. 감옥은 한국인들로 차고 넘쳤다. 어린이도, 노인도, 양반도, 종도 그야말로 모든 사람이 있었다. 수천 명의 항일 운동가들이 총검에 짓밟혔으나 누구도 저항을 하지 않았다.”  
이 신문은 3.1운동을 “세계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봉기”라고 평했습니다. 
미국선교사의 증언만이 아니라, 3.1운동의 중심에 기독교가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 당시 교회와 신도, 목사님들이 만세운동의 앞에 있었습니다. 제암리 교회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리고 당시 국민들은 앞장 선 그들의 뒤를 따랐습니다. 왜? 초창기 한국교회나 성직자들은 본(本)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목사님들이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목사님들의 영성을 6.25전쟁 직후까지와 그 이후로 구분합니다. 
6.25전쟁 직후까지의 목사님들은 일반적으로 성직자들의 청빈한 생활, 진리에 따르는 강직함, 확실한 구원관, 체험적 신앙, 윤리 도덕적으로 청렴함, 복음에 순종하려는 엄격함, 복음에 따른 철저한 희생정신 등이 있었습니다. 세속적인 가치에 물들지 않으려는 경건이 있었다는 판단입니다. 물론 정치적인 성직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교계의 중심에 있을 수 없었죠. 교계를 이끌고 가는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외곽에 있었습니다. 목사로서 목사다운 훌륭한 성직자들이 교계를 이끌었고, 이러한 목사님들은 존경의 대상이었고, 흠모할 만 했습니다.
3.  
바로 이런 본이 되는 신앙의 삶이 세계사에서 유래가 없는 급성장의 한국기독교가 된 힘이요 바탕이었습니다. 불과 반세기 전의 상황입니다. 그런데 반세기도 되지 않는 동안, 한국교회는 어떻게 되었나요? 오늘의 한국교회 타락하여 추락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을 보면 세속주의에 물들어 세상과 다를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세상과 구별이 될까요? 교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구분이 될까요? 성직자들이 평신도들과 세상의 사람들과 무엇이 다를까요? 똑 같아요.  
차라리 세상이라면 굳이 타락이라 탓하지 않습니다. 달라야 교회라 할 수 있는데, 다르지 않기 때문에 걱정하는 것이죠. 한국갤럽의 여론조사에서 87%가 목사의 수준과 품위가 자격미달이라고 여긴다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신도들이 자격미달이라고 여기는데, 강단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오,” 더 나아가 “목사 말에 복종하시오” 할 때, 누가 그 말대로 할까요?     
목사들이 모르는 것이 있어요. 신도들이 목사의 설교를 들을 때, 목사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어서’라는 것을 모르고, 자기의 말을 잘 듣는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젠 신도들도 깨어서, 목사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을 구별할 줄 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자기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에 덧붙여서 자신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죠. 중세기 로마 교황청이 저질렀던 잘못을 답습하는 것이죠.   
물론 목회자의 본질에 성실한 성직자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계 현실은 이들은 교계의 외곽에 밀려나 있고, 교회를 대표하는 자리에 서지 못하기도 하고, 서지 않기도 합니다. 교단을 이끄는 자리에 정치적으로 설 자리도 없어요. 교계를 대표한다는 이들이 목사답지 못함의 폐해가 크고 큽니다. 그래서 묻게 됩니다. 목사의 목사다움이란 어떤 것일까요?  
4.  
먼저 떠오른 말씀이 요한복음 13:14-15입니다. 예수께서 고난의 마지막 주간에 제자들에게 성만찬을 베푸시며, 제자들의 발을 씻어 섬김의 본을 보이신 사건입니다. 너희도 나처럼 하라고 본보이신 일이 제자직의 출발이요 제자의 삶이라고 보여주신 것이죠. 
예수께서 보이신 것은 그 당시로는 파격입니다. 스승이 제자들의 발을 씻는 것, 그 시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인데 실행하셨어요. 예수께서는 왜? 또 누구에게 본보이신 것인가요? 제자들이었죠.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에게가 아닙니다. 12제자에게만 행하셨어요. 나중에 사도(使徒)가 된 제자들입니다. 오늘로 해석하면 목사입니다.   
목사는 교회에서 사도직의 전승자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섬김을 본보이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만 보이신 섬김의 본, 이것을 이어가는 사람이 목사라는 뜻이죠. 그런데 오늘의 목사님들은 어떤가? 섬기는 사람이라고들 말하고 생각은 하지만, 현실은 섬김을 받는 사람입니다. 대접 받지요. 오늘 예배 후 식사 자리에서도 나의 자리는 늘 그랬듯이 가운데일겁니다. 목사의 자리는 존경의 자리입니다. 상석(上席)이죠. 
예수께서 본보이신 자리일까요? 일 년에 한 번 고난주간에 당회원들의 발을 씻는 행사로 섬김을 행사치레로 하는데, 그 사람을 섬기는 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지금의 한국교회의 상황에서는 목사는 섬기는 자리가 아닙니다. 이런 면에서 부끄럽습니다. 부끄러움을 느껴야 해요.  
또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3가지 시험을 거치면서 버린 것이 있어요(마 4:1-11). 물질욕, 명예욕, 권력욕이라고 해석하는 것이죠. 이것들은 예수께서 인류 구원의 길을 걷는데 방해가 된다고 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주기도를 통해서 ‘일용할 양식’으로 감사하는 삶을 신앙으로 가르쳤어요. 물질욕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죠. 물질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이면 되지 않느냐고 하셨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믿음이 ‘먼저’라고 하셨어요. 
신앙의 방해꾼인 사탄, 마귀는 예수께서 버린 것을 줍게 합니다. 먹음직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고, 지혜도 있게끔 포장하여 ‘독(毒)이 든 사과’로 가장 맛있게 보이게 합니다. 백설공주가 유혹에 넘어가 먹고 잠들게 된 것 같게 하죠. 그 결과 독에 취한 목사가 얼마나 많은지, 아편에 취한 것 같이 제 정신이 아닌 목사들이죠. 독을 먹어 온 몸과 영혼에 퍼졌으니, 뿜어져 나오는 것이 독기(毒氣)죠. 이렇게 되면 불행입니다.   
이 길은 목사의 길이 아닙니다. 본을 보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사람이 목사입니다. 이 삶이 세속적 가치를 따르는 것이 될 수 없어요. 생각, 삶, 생활, 가르침, 모든 면에서 달라야 해요. 이렇게 살 때, 비로소 목사를 보며 “본받을 것이 있다”고 하죠. 과연 있나요? 예수님을 본받아 사는 걸음, 이것이 있나요? 한국교회의 목사님들을 6.25직후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평하면서, 제 선친의 세대에는 있었던 것이 제 세대에서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고 보며 가슴을 칩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사는 것이 무엇일까요? 나는 이것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6:17에서 말한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痕迹, 스티그마)이 있다”고 말했을 때의 흔적이라고 여깁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살려고 하는 흔적, 이것들을 성도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목사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녀들에게도 보여주는 성도라야 올바른 성도라는 것이죠.
5.  
마침 지난 2월16일은 윤동주 시인의 70주기 기념일이었습니다. 나는 이 날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윤동주의 시가 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일까?”하며 생각을 시로 정리해 봤어요. 
“내 나이 
예순여덟 
웬만한 일에 영향 받지 않지 
지나치게 감정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외골수로 고집부리지도 않지 
그냥 세상 사는게 
그렇고 그런 줄도 알아 
자기 하나 지키며 
자기 세계를 스스로 구축하고 자족할 줄 알지 
그게 내 나이의 특징이지 
특별히 흔들리거나 변하지도 않아 
그런데 약관 스물여덟에 
나이가 멈춘 
청년 문사, 젊은이에게 
마음을 뺏겨 
그를 만날 때마다 
도전받고 부끄러워하고  
얼굴이 붉어진다니까 
허어, 내 참! 
그의 영혼이 너무 맑아선가 봐 
그의 싯구 하나하나에 담긴 순수와 치열이 
내게 거울인가 봐 
늘 그를 만날 땐 
가슴이 콩닥인다니까 
새 얼굴을 보여줘 
늘 보던 얼굴 듣던 말인데 
새로운 감동에 빠지게 하는 
마르지 않는 매력을 풍겨 
동성애자도 아닌데 
그를 사랑하나봐 
좀체로 다른 사람 영향 받지 않는 편인데 
늙지 않는 젊은 문사 
세상을 떠난 지도 70년이나 된 
그가 
70고개 턱밑까지 온 내게 
인생 선생이라니 
놀라울 뿐이야.”  
윤동주는 대표적 시 “서시”에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기를” 노래했지요. 노래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시처럼 살다 죽었어요. 부끄럼 없는 삶이 되고자 노력한 것이 시 속에 녹아있습니다. 윤동주는 그의 시(詩)만이 아니라, 삶도 본(本)이기 때문에 지금도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목사가 뭘까요? 본 보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목회가 뭘까요? 본 보이는 모든 것이 목회입니다. 예수께서 본보이신 것을 행하는 사람이 목사요, 예수께서 행하며 본보이신 것을 실천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여기에서 성령의 역할이 드러납니다. 성령의 역할이 무엇일까요? 우리로 예수님을 본받으며 살도록 돕습니다. 악령, 사탄과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신기루를 좇도록 유혹하여 예수님을 본받지 못하도록 합니다. 
갈라디아서 6:6-8을 봅시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5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기를 강조하였는데,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을 심으면, 그것을 거둘 수 있지만 허위를 심는다면 아무 것도 거둘 수가 없겠죠. 그리고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않는다고 했는데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현주 목사의 글은 늘 마음속에 경종입니다. 무서운 후배가 되라고 했어요. 환경을 말하는 선배가 있으면 그가 어떤 차를 타고 다니는지를, 교육이 문제가 있다며 잘못을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자신의 자녀들은 어떻게 가르치는지를, 통일, 인권, 민주를 외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통일 준비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만나는 이들에게 얼마만큼 인권적이고 민주적인지를 따져 보고, 그는 얼마나 잘 지키고 있는지를 반드시 살피라고 했어요. 손가락을 높이 세우는 그가 어떻게 사는지를 살펴보는 무서운 후배가 되라는 말입니다. 제가 목사인데, 본 보이는 목사로 올바른지 살피는 무서운 성도들이어야 한다는 말이죠.
6.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예수의 흔적(스티그마)을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으로 살아봅시다. 세상적인 가치 기준으로 보면 가난하게 보이고 고생하는 것 같겠죠. 그러나 그것이 무슨 문제입니까? 내가 일용할 양식으로 살면서 행복하면 되지 않나요? 예수께서 버리라 한 것을 줍느라고 인생이라는 값진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작으나 보람 있는 일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 곧 시간과 재물을 나누어 보셔요. 
그곳에서 무엇이 태어날까요? 태어나는 것이 삶의 긍지가 된다면, 이것이 행복한 것이 아닐까요? 의를 위해서, 바름을 지키려고, 옳음을 세우려고 애쓰며 살아보셔요. 혹시 융통성이 없고, 고지식하며, 바보라는 소리를 들을지는 몰라도,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 날이 약속되어 있다면, 이것이 진실 된 복이겠지요. 예수께서 본 보여주신 예수님의 흔적을 간직하며 사는 목사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 마음을 함께 나누고 싶어요. 늘 고민하고, 끌어안고 끌탕을 만들던 목사 자신의 숙제를, 이 아침, 예따람 성도들에게도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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