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김이곤 설교] 땅에 감추인 하늘

김이곤·한신대 명예교수

성경본문

잠언15:17; 마태복음 13:44

설교문

    “하늘이 땅에 감추어져 있다!”
“하늘 나라 라는 보화가 땅에 감추어져 있다” 
   
    이 말은, 비록 그것이 “비유”라는 형식으로 표현되었다고는 하여도, 매우 대담하고도 파격적인 표현법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은, 일반적으로, 그것이 장소 개념이든 사상 개념이든 간에, 서로 정 반대의 개념!으로 이해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즉 지구가 둥근 것이 아니라 평평한 평상과 같은 것이고 위에는 하늘[천국(天國)]이 있고 그리고 땅 아래에는 지옥(地獄)이 있다고 믿었던 과학 이전의 세계, 이른 바, 삼층천(三層天) 신화(神話)를 믿고 있던 과학 이전의 세계가 아니라 하더라도, “하늘”과 그리고 “땅”은 서로 매우 다른 이질적인 개념이고 또 결코 서로 섞일 수 없는 “반대적(反對的) 개념(槪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가 땅에 묻혀 있다”라는 표현은, 그것이 현대과학적 우주관이나 세계관이 형성되지 못했던 기원 1세기의 글이라고 생각할 때, 그 표현은 실로 매우 대담한 역설적(逆說的) 표현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가 땅에 묻혀 있다>라는, 이른 바, 시대를 거스르는 이 대담한 표현법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오늘의 우리에게 가르치려는 그 중심적인 교훈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하늘나라의 현실을 예수님께서는 과연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며 그 “천국”은 도대체 오늘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의 신약본문을 구약본문과 함께 살펴 보면, 다음 세가지 정도의 특징적인 강조법을 통하여 설명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천국이라는 보화”는 “감추인” 보화요 “감추어져 있는” 실재라는 것, 즉 “감추어져 있다”는 데 강조점을 두고 있는 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천국은 외적인 현상 속에 전시효과적으로 요란스럽게 나타난다기 보다는 “내적인 현상”을 통해서 서서히 “밖으로” 들어나는 그 어떤 것이라는 것을 교훈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말하자면, 천국은 황금보석으로 꾸민 그 어떤 외형적 모습을 통하여 쉽게 판별할 수 있는 그런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히려, “천국”은 “감추인 보화”처럼 그 어떤 보이지 않는 “내적인 사건”을 통하여 서서히 그 힘과 위력을 “밖으로” 드러내어 완성되는 성격의 것이라는 그런 말입니다.
    흔히들, 천국을 말할 때는, 화려한 그림을 그려서 요란스럽게 선전효과를 내려고 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매개로 하여 순박한 민중을 종말론적 묵시론(黙示論)으로 현혹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이것은 매우 위험스러운 반 기독교적 논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서가 기록될 때 사용된 표현법 중에는 “묵시문학적(黙示文學的) 언어(言語)”로 표현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묵시문학적 언어는 어떤 사건이나 사물을 표현할 때 사실적(寫實的)으로 표현하지 않고 “은유”나 “비유”나 또는 “상징 언어”를 사용하여 표현하기 때문에 성서 독자들이 그러한 표현들을 그냥 문자 그대로만 이해를 하는 경우, 그 표현에 대한 이해는 거의 100% 잘 못 되게 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하늘 보좌의 네 생물들과 장로들 사이에 서 있는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라고 할 때, 어떤 이가 말하기를, “그러면, 예수님이 동물이냐?” 라고 묻는다면 이 물음이야 말로 대단한 무지(無知)와 엄청난 신성모독적(神聖冒瀆的) 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경우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어린 양”이라고 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대속제물로서의 양(羊)의 죽음에 비유하기 위한 것이지 예수님이 곧 “양”이라는 의미의 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라고 말할 때, 이 비유는 어디까지나 “비유로서!” 이해를 하여야 하고 그리고 이 비유에 나타나는 언어들도 결코 문자적으로 이해하여서는 안된다는 것, 그러므로, 비유를 다룰 때나 묵시적, 종말론적, 상                                 2
징적 언어들을 다룰 때는 반드시 우리는 그 언어가 표현하려고 하는 바의 “동기”나 “목적 ”또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데 전적으로 관심하여야 한다는 그런 말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오늘 읽은 예수님의 천국비유도 즉 “땅에 감추인 하늘” 비유도 또한 이러한 이해(理解)를 사전에 갖고서 살펴 보아야 한다는 그런 말입니다.
    우선, 우리는 이 비유의 동기, 목적, 의도는, 분명, “천국의 선교 방법”에 관심을 둔 것이 아니고, “천국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려는데 있다는 것을 손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즉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을 특별한 해석을 통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읽는다 하여도, 우리는, <천국은 사람들이 그것을 소유하기 위하여서는 다른 모든 것은 모두 미련 없이 포기하고 단념해도 좋을 만한 절대적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려 하고 있다는 것을 당장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찰이 옳다는 것은 바로 그 다음에 연결되는 또 하나의 천국비유인 “값진 진주를 구하는 장사의 비유”(마태 13: 45-46)에서도 또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천국”은 상인(商人)이 그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재산을 다 팔아서라도 그 하나 만은 사야 한다 하여 사들일 만큼 그렇게 가치가 있는 “값진 진주”와 같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비유를 읽을 때 우리에게 지워진 과제는 분명, 모든 것을 다 포기하더라도 그것 하나 만은 반드시 소유해야 할 값진 보물, 즉 “천국”이라는 보물은 과연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느냐 하는 것을 규명하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비유를 보면, 우선 첫째로,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 또는 “땅에 묻힌 하늘” 등으로 비유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천국은 그 무엇보다도 <감추인 실재>라는 것입니다. 즉 하늘 나라는 우리에게는 늘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이 우리 비유가 말하려는 첫 번 째 포인트라고 하겠습니다.  이 사실은 오늘 우리가 읽은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와 그 다음에 연결되는 “값진 진주를 구하는 장사 비유”가 다같이 공(共)히 말하는                                 3
바, “발견하면”이라는 말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는 점을 통해서 볼 때 더욱 분명해 집니다.  즉 “천국”은, 본질상, 발견해야만 하는 “감추인 실재”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은 쉽게 밖으로 들어나는 것, 우리 눈에 쉽게 포착되는 것, 선전효과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묵시록에서 말하는 것 같은 그런 화려한 도시와 같은 것이라고 문자적으로 이해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즉 벽옥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고 각색 보석으로 주춧돌을 놓았을 뿐만 아니라 열 두 가지 진주로 꾸민 열 두 대문을 갖고 있는 화려한 궁궐과 같은 것이 “천국”이라는 생각은 우선 일단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이므로 우리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리 만큼 아름답고 평화스러운 세계일 것임이 확실합니다만,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천국비유가 관심하고 있는 바는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려하게 그린 묵시문학적 그림과 과장된 환상적 표현에 현혹되어서는, 천국의 진정한 현실을 발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천국시민이 될 수는 더욱 없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우리의 비유에서 가장 먼저 강조될 부분은 “천국”은 결단코 화려한 외형을 갖춘 꿈과 환상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에겐 어디까지나 “감추인 실재”라는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7장 20-2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이 사실을 강조한 바가 있습니다. 즉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 옵니까?” 라고 물었더니,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는 오지 않는다.  또, ‘보아라, 하나님 나라는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라고 말할 수도 없다” 라고 단언하시기까지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 나라”는 본질상 그러한 화려한 외형으로 인하여 우리의 눈으로 쉽게 볼 수 있도록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런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 예수님의 확신이었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는 어디까지나 “감추어진 실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를 눈에 보이는 길바닥이나 시장바닥으로 끌                                 4
어 낼려는 것은 언제나 진리를 외곡시키는 악마의 장난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리 한 복판으로 끌어내어 많은 사람의 박수갈채를 받게 하고 그를 통하여 그 무슨 굉장한 센세이션이 일어나도록 종용하는 자들도 많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만, 성서는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서 매우 단호하게 “사탄의 유혹”이라고 일축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탄은 많은 관중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아슬아슬한 자리 높은 곳에 곡예사나 마술사를 세우듯이 그리스도를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 높은 곳에 세워 놓고 그 성전 아래로 발가락 하나 다치지 않고 사뿐 뛰어 내리게 하는 센세이셔날한 사건을 일으키게 함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거짓된 천국환상에 빠져들게 만듭니다.  그러나, 천국은 그런 환상적이고 흥행적인 것은 결단코 아니!!라는 것, 결코 기독교 선전의 수단이나 기독교 부흥의 상업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우리 본문이 첫째로 지적하는 강조점이라 하겠습니다.
    그 다음 둘째로, 우리 본문은 “하늘나라”가 “땅”에 묻혀 있다는 것, 특히, “밭”에 묻혀 있다는 것을 말함으로서 천국이 삼층천(三層天) 꼭대기 어느 장소, 즉 이 세속 세상과는 별개의 어느 지역에 따로 준비되어 있는 그런 것이 결코 아니라(!) 우리가 발붙여 살고 있는 이 땅에 묻혀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늘나라”는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땅에 있다는 것이며 그것도 그냥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터전인 “밭”에 묻혀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천국”은 “땅”에 묻혀 있되 그러나 “밭”에 묻혀 있다는 것입니다. 
    “밭”은 일상생활의 생업(生業) 장소입니다.  말하자면, 고부 간의 갈등이 있고 부부 간의 긴장이 있으며 치열한 생존경쟁의 반목과 질시가 있고 자리 다툼의 권력암투가 있으며 이데올로기의 분쟁이 있고 종교교조 간의 심각한 불협화음이 있는 그런 우리네 고달픈 인간 실존의 현주소, 바로 거기에, “하늘나라”가 쉽게 포착하기 어렵도록 “묻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은 역사 초월적(超越的)인 “구름 위의 세                                   5
계”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저 너머의 그 어떤 신선(神仙)들의 세계인 “무릉도원”(武陵桃源)에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죽은 망령(亡靈)들이 가서 모여 사는 지구 밖의 그 어느 또 다른 별[星]의 세계라고 생각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쫀 번연(J. Bunyan)의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이 말하듯이, 기독도가 천신만고 끝에 도달하게 되는 그런 그 어떤 세상 끝에 위치하고 있는 “최종 순례지”와 같은 그런 곳이라고 생각하여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단지 우리의 일상생활의 생업 장소 현장인 “밭”(!), 씨를 뿌리고 물을 대고 거름을 주고 하면서  거두어 들인 곡식을 이웃과 나누어 먹고 사는, 그런 그 우리의 삶의 현장 한 가운데 “천국”이 숨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저 멀리 먼 곳어느 별나라에서 구름을 타고 서서히 지상으로 내려 오는 그런 휘황찬란(輝煌燦爛)한 고대 페르샤의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환상적 세계와 같은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애절하게 가르쳐 주시려고 하신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누가복음 17장 20b-2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이렇게 말씀하시었던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하지 못하리니 하늘나라는 바로 너희 안에 있다!!”
     여기 “너희 안에 있다”라는 말씀, 희랍어 원문으로는 “엔토스 휘몬”(έντος ύμϖν)이라고 하는 말이 사실 오늘 우리가 풀려고 하는 문제의 매듭을 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키 워드”(key-word) 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이 “엔토스”라는 말은 “너희 가운데” 또는 “너희 사이에” 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이 말씀은 “너희 마음 속에”라는 말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 즉 “너희의 현재적 자리 바로 그 가운데”라는 말,  좀 더 구체적으로는 “이미 너희 가운데 있다”라는 뜻의 말입니다.  이 “너희”라는 말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지금 이 말씀을 말씀하고 계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 자신 께서 그 속에 포함된 그런 그 “너희”라는 의미의 말씀, 즉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뫼시고 있는                                 6
그 “우리들 안에”라는 의미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은 결단코 그 어떤 “세상을 초월한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결코 “이 세상, 저 세상”하는 그런 이분법적(二分法的) 개념(槪念)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기자가 말하였던 바, 저 너무도 유명한 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라고 한 말이 바로 이러한 “이 세상 저 세상”하는 따위의 “이분법적 사고”(思考)가 얼마나 잘 못되고 얼마나 왜곡(歪曲)된 것인지를 단적으로 지적해 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온 우주가 모두 주님께서 창조하신 주님의 세계인데 그 주님의 세계를 이분화 시켜 다른 곳에서 열심히 찾는다는 말은 이미 어불성설(語不成說) 중의 어불성설이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너희 가운데 있다”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늘 나라를 그 어떤 신비한 환상의 세계로 탈(脫) 세상화/탈(脫) 역사화 하여서는 안된다>는 것, <하늘 나라는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하고 “우리” 안에서 만들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다음,  셋째로, 마지막으로, 우리의 본문이 강조하고 있는 점은 “밭에 묻혀 있는 보화를 발견한 자가 기쁨에 가득 차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샀다는 점”입니다.  즉 보화를 발견한 자의 “변화된 모습과 결단(決斷)하는 그 행위”를 특별히 부각시키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보화를 발견한 자에게 나타난 결정적인 모습은 “이전과는 달라 졌다는 점”입니다.  “변화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미 이전의 그는 아니었습니다.  이전에 갖고 있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보화 하나를 사들였다는 것입니다. “가치관의 변화”가 찾아 왔던 것입니다.  달라 졌다는 것입니다. 그 얼굴에는 전에 없던 남모르는 기쁨으로 충만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는 그 보화를 발견하기 “전(前)의 그”는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되었던 “그” 였던 것입니다. 이전엔 그토록 귀하게 여기고 그토록 소중한 것으로 애지중지(愛之重之)하였던 그 모든 것을 이젠 모두 다 똥으로 여길 만큼 가치관의 대 변화를 가져 왔고 사                                 7
람이 확 달라졌던 것입니다. 
    이마엔 검붉은 흙이 땀과 엉키어 무질서하게 묻어 있고 양 볼에는 몇 줄기 씩의 흙과 엉킨 땀방울이 줄줄이 흘러내리지만, 햇빛에 그을린 거무스름한 저 농부의 그 얼굴이 어찌 그리도 저렇게 기쁨에 충만해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늘나라”라는 그런 큰 보화를 발견하였기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그 넘치는 기쁨이 드디어는 그를 하나의 “전혀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시켜 주고 있었습니다.        가치관의 변화가 찾아 왔던 것입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을 보는 눈, 이웃을 보는 눈, 남편을 보는 눈, 아내를 보는 눈, 시어머니를 보는 눈, 며느리를 보는 눈이 달라졌던 것입니다.  돈 아니면 상대도 않던 지독한 어느 수전노 집사님이 기쁨과 감격에 가슴이 찢어질 듯 변화된 모습으로, “장로님, 오늘 저녁 만찬은 제가 모두 마련하겠습니다.  저도 제 아들 놈이 다니는 학교에 개인으로 전재산을 틀어 내어 장학기금을 하나 만들었습니다!”라고 하면서 터져 나오듯 자신의 변화된 기쁨을 토로할 수 밖에 없는 그러한 변화, 이른 바, 세상을 보는 눈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변화가 “하늘나라”라는 보화를 발견한 후에 찾아 온 변화였던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현실이 바로 이러한 것이라는 것이 우리 본문이 말하려는 요지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문제는 <밭을 산 그 사람의 마음을 저리도 달라지게 만들고 또 저토록 큰 기쁨의 감격에 사로잡히게 한 그 “하늘 나라”라는 보화라는 것이 이 비유를 듣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과연 구체적으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규명하는 일>, 그것이 될 것입니다.  무엇이 그를 저토록 크게 변화를 하게 한 것일까요?  무엇이 그를 저토록 큰 기쁨과 큰 즐거움에 가슴 벅차 하도록 한 것일까요?  우리의 이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 우리의 생업의 장소 그 한 가운데 감추어져 있으나, 그것을 발견하면 기쁨과 감격에 충만하여 모든 것을 다 팔아서라도 그것을 사려고 하게 되는 그런 “하늘 나라”라는 보화는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미 앞에서, 우리의 “천국비유” 본문이 가르치고 있는                                 8
바에 따라, <“하늘 나라”라는 보화는 눈에 보이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한 복판에 감추어져 있는 것으로서 그것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로 하여금 뜨거운 감격과 기쁨을 가지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서는 다른 모든 재산을 다 팔아서라도 사들이게 되는 그런 것, 즉 우리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변화하도록 만들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라는 증언을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비유를 통하여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늘 나라”라는 “보화”는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그것도, <땅에 묻혀 있는 “하늘 나라”라는 보화>는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우리 눈에는 쉽게 포착되지 아니 하나, 그러나, 언제나 우리의 삶 한 가운데 있고, 그리고 우리의 모든 소유를 다 틀어 넣어서라도 그것 하나 만은 얻으려고 결단하는 그런, 우리 인간의 구극적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 만일 있다면, 그것은 혹 정치권력이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것을 얻기 위하여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그것을 얻으려고 아웅 다웅 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자주 보기 때문입니다.  선거철이 되니까 더욱 그런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아도 우리는 곧  “아니야, 아니야, 그것은 아니야!” 라고 머리를 흔들면서 “정치권력”이라는 것이 “하늘나라”에 견줄만한 보화라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 라고 주장하면서 “권력무상(權力無常)!” “권력무상!” 이라고 외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비록 거기에 “정치신학”이라는 것이 있다고는 하여도, “정치권력”이라는 것이 그 무슨 우리의 뜨거운 감격과 기쁨을 이끌어내는 그런 <하늘나라 보화>라고는 결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게 “돈”이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왜냐하면, “돈” 생기는 일이라면, 앞 뒤, 물 불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행하는 것이 인간세계이기에, 이 “돈”이 혹 우리를 이루 형언하기 어려운 환희로 몰아 넣는 “천국보화”라는 것이나 아닐까 하고 생각도 해 봅니다.  흔히들, “인간은 경제동물이다”라고들 말                                 9
하며, 정치권력 문제보다 민생문제가 즉 경제문제가 그 무엇보다 더 앞선다고들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돈”으로 인한 비리(非理)가 우리 사회의 도덕을 그 기초에서부터 뒤흔들어 놓고 있는 “사회 파괴의 원흉”이라는 인식이 우리 사이에는 이미 국민적 인식이 되다시피 하고 있고, 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딤전 6: 10)라고 성서가 가르치기 까지 하였으니, 이러한 “돈”을 감히 “하늘 나라”와 견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해서 성서는 도대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밭에 감추인 하늘나라”란 도대체 무엇을 두고서 하는 말일까요? 성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서 단도직입적으로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고도 하지 못하리라.  하늘나라는 단지 <너희 안에 있다!!>”(눅 17:21)라고 단언하가 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실로, 성서는, 신구약을 통틀어서, 여기서 말하는 것 만큼 그렇게 분명하게 이 문제에 대하여 대답한 곳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선언은 진실로 매우 결정적인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늘나라” 라는 보화는 <너희 안에!! 있다>라고 함으로서, 하늘 위나 땅 아래나 심산계곡과 같은 그 어떤 이 세계와는 전혀 다른 은밀한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함게 하는 그 <너희 안에!!>/<우리 안에>라는 곳이 바로 다름 아닌 “하늘나라”라는 보화가 숨겨져 있는 곳이라고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십자가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몸소 보여 주신 그 그리스도가 그 중심부에 서서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는 그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옳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통한 하나님 아버지의 그 끌 수 없는 사랑, 그 다함 없는 사랑의 힘이 우리를 이끌고 우리를 양육하여 우리를 통치하는 그 세계!!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통치원리가 되는 그 세계!!가 바로 땅에 감추인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안에>라는 말씀의 의미를 흔히 “천국”은 여기에도 저기에도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마음 안에> 있다라는 그                                 10
런 그 어떤 “정신적인 의미”, 또는 마음 쓰기에 따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그런 그 어떤 “심리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너희 안에”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으로 있는> 이라는 의미,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의 정신이 우리 안에 들어 와!! 우리의 통치 원리가 되는 그 세계가 바로 다름 아닌 “땅에 묻힌 하늘 나라”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름직이!! 우리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통치하는 세계를 우리 안에 구축하는 일을 하려는 그 결단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안암 신앙 공동체>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며, 우리는 감히 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기뻐하고 기뻐하며, 이 <안암교회>라는 <하늘 나라 보화가 뭍힌 밭>을 일구는데 우리의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메시지는 그러므로 “총동원 주일”을 맞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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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통찰이 없는 신념은 맹신이 될 수 있지만..."

장공 김재준의 예레미야 해석을 중심으로 예언자의 시심(詩心) 발현과 명징(明徵)한 현실 인식에 대한 연구한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윤식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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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현존, '경계의 신학'을 '경계 너머의 신학'으로 끌어올려"

폴 틸리히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한국조직신학논총 제73집(2023년 12월)에 발표된 '폴 틸리히의 성령론: 경계의 신학에서의 "영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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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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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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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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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