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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순 칼럼] 5·16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박재순 씨알사상연구소장 · 목사

새삼 5·16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문제가 되고 있다. 여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5·16을 일으킨 박정희의 딸이고 5·16을 옹호했기 때문에 이번 대통령 선거가 끝날 때까지 이 문제가 논란이 될 수 있다. 따라서 5·16을 법적으로 역사적으로 철학적으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 또 5·16은 먼 과거의 일이 아니라 50 년 전에 일어났던 동시대의 사건이므로 5·16의 공과를 객관적으로 짚어보고 5·16 군사독재 속에서 살았던 경험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우선 5·16은 법적으로 혁명이 아니라 쿠데타인 것이 분명하다. 일부 군인들이 작당해서 군의 위계질서와 명령체계를 깨트리고 군을 장악하고 국가의 헌법질서를 유린했기 때문이다. 성공했거나 실패했거나 관계없이 5·16은 쿠데타일 뿐 결코 혁명이 될 수 없다.

성공한 쿠데타라고 해서 혁명으로 미화한다면 앞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는 군인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없게 된다. 군의 생명인 위계질서와 명령체계를 짓밟은 군인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 법적 근거나 도덕적 근거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다만 히틀러처럼 광란에 빠진 독재자가 군을 장악해서 세계대전을 일으켜 수천만의 인류를 죽음에 빠트리고 6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하고 폴란드인, 러시아인, 집시와 장애인들을 죽음으로 몰아갈 때는 보편적 생명권과 양심과 정의의 이름으로 독재자를 처단하는 것이 정당화 될 수 있다. 이처럼 예외적이고 분명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5·16은 오랜 식민지 생활과 남북분단, 6·25전쟁, 이승만 독재 14년을 거쳐 4·19학생혁명으로 민주주의가 싹튼 지 겨우 1년이 지난 시점에 일어난 군사적인 변란이었다. 민주주의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고 시행착오를 가치면서 오랜 과정을 통해 키워나갈 나무와 같은 것이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오랜 인내와 기다림이 요구된다. 그런데 일부 젊은 장교들이 몇 해를 참지 못하고 민주당 정권인사들의 부패와 무능을 비난하면서 총을 들고 한강다리를 건너 군과 정권을 장악했다. 5·16은 군사적으로 법적으로 정치적으로 정당화하거나 용납될 수 없는 범죄행위다.

또 5·16은 한국근현대의 역사 속에서 정당화될 수 없다. 조선왕조 말엽부터 한국사회는 동학혁명, 삼일독립운동, 4·19혁명으로 이어지는 민생과 민주의 큰 흐름을 이어왔다. 무능하고 부패한 조선왕조의 폭압적인 지배와 수탈 속에서 민주·민생의 운동이 힘차게 일어났고 일제의 식민통치 36년을 견디면서 삼일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민주·민족·세계평화의 큰 흐름을 이어왔다. 5·16은 한국현대 100년 역사의 중심과 흐름을 거스른 것이다. 동학혁명과 삼일독립운동과 4·19혁명이 깊은 정신과 높은 도덕과 맑은 지성을 나타낸다면 5·16은 총칼의 폭력과 군사적 야심을 드러낸다. 총칼을 앞세워 지배한 5·16은 한국을 침탈했던 일제 군국주의세력을 계승한 것이고 군인들이 광주시민들을 학살했던 5·18로 이어진다. 한국을 식민통치했던 일제의 군국주의세력과 5·16과 5·18은 역사적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5·16이 없었다면 5·18도 없었을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5·16은 역사적 반동성과 도덕적 패륜성을 지니고 있다. 5·16은 민주와 평화를 향한 큰 흐름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반동적이고 민족을 짓밟은 일제의 군국주의세력과 닿아 있고 나라의 주인과 어버이 같은 시민들을 학대했을 뿐 아니라 시민들을 살육한 5·18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패륜적이다.

5·16은 철학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다. 생명진화와 인류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5·16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물질에서 생명이 나오고 생명에서 심성이 빚어지고 심성에서 지성이 피어나고 지성이 얼(靈)과 신으로 솟아났다. 한 마디로 생명진화와 인류역사는 물질에서 지성과 영성으로 나아가고 올라가는 과정이다. 사람의 손이 얼마나 섬세하고 평화롭게 만들어졌고 사람의 얼굴이, 눈과 코와 입과 이마가 얼마나 존귀하게 지어졌는가? 사람의 손톱은 얼마나 부드럽고 연약하며, 손가락과 손은 얼마나 부드럽고 섬세한가? 수 십 억 년 생명진화 과정을 거쳐서 사람의 손이 이처럼 섬세하고 평화롭게 진화한 것이다.

사람의 이빨은 작고 둥글고 뭉툭하여 서로 물고 뜯기에는 적합하지 않게 진화했다. 맑은 지성이 담긴 말을 하기에 적합하도록 사람의 입과 이빨이 진화한 것이다. 사람의 손톱은 상대의 목줄을 따고 할퀴기에는 적합하지 않게 만들어졌다. 사람의 눈은 속 깊은 정과 생각을 나누기에 적합하도록 맑고 투명하게 지어졌다. 수 십 억 년 생명진화 과정을 거쳐서 사람의 몸은 평화와 지성을 위해 준비된 것이다. 사람이 서로 손잡고 협력하고 함께 생각하고 말하고 소통했기 때문에 생존투쟁의 역사에서 이기고 살아남았으며, 인류문명을 지어낼 수 있었다. 인류가 만일 군사력과 폭력만 의지했다면 결코 생존할 수도 없고 문명사회도 지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5천년 국가문명이래 군사주의가 줄기차게 지배해왔지만 군사주의는 결코 생명과 인간정신의 본성에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고 파괴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5·16은 장구한 생명진화와 인류역사를 거스른 것이고 생명의 본성과 인간정신의 본성을 짓밟고 파괴한 것이다. 군국주의와 군사쿠데타는 필요악처럼 극복되어야 할 것이지 결코 미화되거나 찬양될 것이 아니다.

아직도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있고 5·16을 정당화하거나 용인하려고 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들이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지니며 5·16을 미화하려고 하는 것은 박정희 군사정부 기간에 산업화가 진전되고 경제성장이 이루어졌고 가난에서 벗어나 물질적인 풍요사회로 들어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통치기간에 수출이 크게 늘고 경제성장이 이루어지고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게 된 것은 사실이다. 민주주의를 짓밟고 국민을 억압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를 높게 평가하는 것은 경제성장과 산업화의 업적이 박정희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연 경제성장과 산업화의 업적이 박정희에게 돌아가는 것이 온당한 일일까? 물론 박정희가 독재적인 지도력을 발휘해서 기업과 국민을 이끌어 경제성장과 산업화를 이룩하는데 일정 부분 기여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이른바 개발독재를 통해서 경제개발과 산업화를 이룩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군사독재가 한국에서 경제개발과 산업화에 기여했다고 인정하더라도 군사독재가 경제개발과 산업화의 충분한 조건이 되지는 못한다. 군사독재국가들이 세상에 많이 있었지만 군사독재국가들 가운데 경제성장과 산업화를 이룩한 나라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만과 싱가포르가 독재정권 아래서 산업화를 이루는데 성공했지만 작은 섬나라거나 도시국가이고 이들의 정권을 군사독재라고 할 수는 없다. 반대로 민주정부 아래서 경제성장과 산업화를 이룬 나라들이 세상에는 훨씬 더 많다. 경제성장과 산업화는 민주정부 아래서 이루어지는 것이 상식이고 원칙이다. 일본과 서구국가들은 모두 민주정부를 통해 경제성장과 산업화와 복지사회를 이룩했다.

한국에서 박정희군사정부 기간에 경제성장과 산업화를 이룬 것은 예외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자본과 기술이 없는 가난한 나라에서 어떻게 눈부신 경제성장과 산업화를 이룩할 수 있었을까? 한 마디로 양질의 노동력이 풍부하게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통치와 남북전쟁의 고난과 시련을 이겨낸 강인한 민중들이 있었고, 교육열에 불타는 교사들과 학생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처럼 가난한 나라에서 중고등학교와 대학 교육을 받은 우수한 인재와 인력이 풍부하게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 군사독재시기에 눈부신 경제성장과 산업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우수하고 풍부한 노동력이 없었다면 박정희정권은 결코 경제성장과 산업화를 이룩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국의 경제성장과 산업화의 진정한 주역은 고난의 역사 속에서 단련되고 높은 교육을 받은 뛰어난 민중이다. 그 다음에 외국에서 빚을 끌어다 재벌을 키우고 저임금과 혹독한 노동조건 속에서 민중을 혹사시킨 군부정권과 재벌들이 한국의 경제성장과 산업화를 위해 보조적인 구실을 했다.

한국 민중은 오랜 역사 속에서 고난을 겪으며 오랜 세월 가난과 굶주림 속에 살았기 때문에 가난과 굶주림에서 벗어난 기쁨과 감격을 느끼며 자신들 위에 군림한 독재자에게 공을 돌리고 그 독재자에게 감사하기도 한다. 한국 민중이 경제성장과 산업화의 공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독재자에게 돌리는 것은 한국 민중이 인정이 많고 겸허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진실을 말한다면 경제성장과 산업화의 주역과 주된 요인은 역사 속에서 단련되고 높은 교육을 받은 다수의 민중이다. 그러면 한국역사 속에서 민중의 단련과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동학혁명과 삼일독립운동과 4·19혁명을 통해 한국 민중은 강인한 생명력과 집단적 의지력을 가지게 되었고 안창호 이승훈의 교육입국운동을 통해 높은 교육열을 가지게 되었다. 흔히 높은 교육열은 학문을 중시한 유교전통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유교 전통만으로는 한국 민중의 높은 교육열을 설명할 수 없다. 나라가 망하고 일제의 식민지가 되는 과정에서 안창호는 나라의 토대와 주인과 주체인 민을 깨워 일으킴으로 나라를 되찾고 바로 세우려 했다. 민을 교육하여 깨워 일으키는 것을 주요강령으로 하는 신민회를 조직한 안창호는 전국적으로 교육운동을 일으켰다. 안창호의 교육운동에 동참한 이승훈은 오산학교를 세우고 삼일독립운동을 주도함으로써 민을 주체로 깨워 일으키는 일에 평생 헌신하였다. 안창호와 이승훈의 영향으로 수많은 독립애국지사들이 몸과 재산을 바쳐서 민중교육운동에 헌신하였다.

민중교육을 통해 나라를 되찾고 바로 세운다는 일념으로 희생하고 헌신했던 안창호와 이승훈과 수많은 독립지사들의 노력으로  한국 민중의 교육열은 비교할 수 없이 높아졌고 교육의 일념이 한국 민중의 가슴에 사무쳤던 것이다. 안창호와 이승훈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교육입국운동은 당대에는 그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없지만 이들이 뿌린 교육운동의 씨앗은 해방 후 민주화와 산업화의 성공으로 열매를 맺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근대화, 다시 말해 민주화와 산업화는 동학혁명, 교육입국운동, 삼일독립운동, 4·19혁명을 통해 씨앗이 뿌려지고 1960년대 이후 싹이 트고 열매를 맺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을 말하면서 군사독재세력과 재벌을 산업화세력이라고 함으로써 산업화의 공로를 군사독재세력과 재벌에게 돌리는 것은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고 은폐하는 것이다. 산업화의 공로는 일차적이고 근본적으로 노동자 농민에게 돌리고 이차적이고 부수적으로 독재정권과 경제 행정 관료들과 재벌세력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경제성장과 산업화의 공로를 박정희에게 돌리는 것은 역사적 착시현상이고 역사적 진실의 왜곡이다.

돌이켜 보면 박정희정권과 그 계승자인 전두환 정권 시절의 삶은 악몽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숨도 편히 쉬지 못하고 가위 눌린 것 같은 삶을 30년 동안 살면서 일상생활이 악몽을 꾸는 것처럼 느껴졌다. 20 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때의 삶이 까마득한 악몽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늘 감시 받는다는 느낌을 받고 말도 제대로 못하고 노래도 옷차림도 머리모양도 맘대로 못하는 세월을 살았다. 머리가 길다고 젊은이들을 길거리에서 붙잡아서 현장에서 가위로 머리를 깎기도 하고 국민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 ‘동백아가씨’, ‘왜 불러’, ‘고래사냥’, ‘아침 이슬’을 금지곡으로 만들기도 하고, 술 한 잔 마시고 북한이나 김일성에 대해서 한 마디 했다고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으로 감옥에 처넣어서 막걸리 보안법이란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반공을 국시(國是)로 한다며 용공조작을 일삼는 국가폭력이 일상화한 시절에, 12시 통금시간에 쫓겨 온 국민이 동동거리던 시절에 무슨 자유와 평안이 있었겠는가!

양심의 자유, 말의 자유, 일상생활의 자유가 없는 시절을 어떻게 좋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시절이 다시 오기를 누가 바라겠는가? 정말 역사를 알고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그 시절을 그립다고 하겠는가? 역사를 꼬부리고 진실을 왜곡해서 개인과 당파의 이익과 명예를 취하려는 사람들이야 무슨 말인들 못하겠는가? 역사를 생각하는 사람은 생명진화의 역사가 물질의 힘에서 정신의 힘에로 승화 발전해 왔고 인류역사가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왔다는 것을 인정하고 5·16의 자리가 생명진화와 인류역사 속에서 어디 있는지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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